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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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6월 15일 수기, piacere

jo_nghyuk 2019. 6. 16. 06:03

내가 아닌 모습이 되려고 하면 힘이 많이 들어간다. 반대로 내가 가야할 길이면 힘을 꼭 빼신다. 프랑스어반은 이상하게 빠질 일이 꽤 생기고 독일어에 더 집중하게 된다. (덕분에 여행 전에 이탈리아어를 공부할 여력이 생겼다.)

삶의 기름기를 빼는 것은 생각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취미로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이유는 게임을 끊고 생산적인 취미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나는 키보드로 격투게임의 타격기 커맨드를 열심히 타건할 수도 있고, 같은 것으로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의 철자들을 조립할 수도 있다. 선택은 나의 자유에 달려 있고, 나의 원함에 달려 있다. 나의 옛 지인은 내가 강박적으로 게임을 지우(고 까)는 것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었다. '계속 다시 돌아가면서 그런 노력을 왜 해?'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수없이 넘어지길 반복하면서 그럼에도 자전거를 타고자 하니까 계속 넘어지는 거 아닐까?

나는 생각보다 매우 섬세한 형질이고, 분명한 것을 늘 추구하고자 한다. 부드러움과 단단함의 공존을 즐거워하고, 약간의 지혜와 약간의 어리석음이 함께 있는 자연스러움이 참 좋다. 몸에서 지각하는 감각들이 또렷하게 분화되는 것도 좋고, 여름 밤에 짧은 소매 밖으로 드러나는 팔 다리의 선이 가져다주는 생의 감격 같은 것에도 무너져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그러한 또렷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버리고, 다시 뒹굴고 다시 버리고 다시 주워오고를 대체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반대로 그러한 엎치락 뒤치락의 치열함과 처연함이 없이 또렷함이란 게 즉자적으로 주어지기나 하는 것일까. 자기확신과 자기소외를 수 번이고 반복하고 나서야 인간은 빛나는 진주 한 알을 얻어내게 되는 것이다. 생이란 확신의 직선도로가 아니라 수많은 회의와 의심과 불안과 혼란을 거쳐 정련된 물길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괜찮다piacere고, 원래 그러한 것이라고, 안아주고 덮어주고 감싸는 공간의 자궁이 없이 독립된 개인은 그냥 외롭고 긴 싸움을 지속할 뿐이다. 

그러니까 길이란 건,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따라가 보는 것일수도 있다. 그건 어쩌면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것의 가르침을 스스로 몸으로 톺아보면서 실행해보는 미메시스mimesis 같은 것이다. 일단은 따라해보면서, 그것이 몸에 익고 나면 창조적인 변형 같은 것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존재의 적응을 위해서 스스로 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인 동시에 누구도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연결되어서 같은 길을 걷지만 저마다의 다른 형질이 주는 경험을 통해서 다른 모양으로 걷는다. 벡터량은 같지만 시간경험의 질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괜찮다es geht고 말하고, 단단한 길을 재미있게 걸어가는 편이다. 내 발은 부드럽고, 돌길은 거칠다. 내 영혼은 새처럼 가볍고 내 육신은 돌덩이처럼 무겁다. 내 기질은 예술가인데, 내 환경은 Schlachtfeld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중간의 무엇이고 그래서 창조적인 어떠한 현존Dasein이 아닐까. 늘 변화하고 늘 통합하는. 

재밌어야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잘하기 위해 재미를 넣는 것이 아니다. 새는 새가 되어야 하늘을 활공할 수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가 되어야 물 속을 유영할 수 있다. 가라는 곳에 가야 내가 된다. 설계되어진 대로 제 자리를 찾는 것은 사랑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 경험을, 내가 아니면 네가 감히 몇 마디 말로 일축할 수 있을까? 모든 이의 경험은 고유해야만 한다. 베르그송Bergson의 주체처럼 너의 시간경험은 무엇에도 환원될 수 없게 고유한 것이다. 너는 너다. 그리고 네가 너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나도 나로서 존재할 수가 있다. 네가 참으로 네가 되어야 나는 그때 너와 나를 우리라고 말할 발판을 딛게 될 것이다. 

애쓰고 싶지 않다. 재밌어서 그냥 잘 하고자 하고 싶다. 

살자. 죽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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