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7월 22일의 수기, 후설의 현상학에 부쳐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7월 22일의 수기, 후설의 현상학에 부쳐

jo_nghyuk 2019. 7. 23. 01:07

여행이 끝났다. 에너지도 시간도 돈도 다 소진되었다. 벽에 꽂은 아이폰처럼 하루종일 침대에 결속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 두 교회에서 찬양을 하면서 내 안에 줄곧 목말랐던 어떤 것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환상이라던가 하는 것을 잘 못보는 편인데 바이마르에 와서 기도를 하면서 또는 찬양을 하면서 아름다운 환상을 이따금씩 본다. 아름다운 곡선을 긋는 돔 지붕과 웅장한 제단과 미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한 성전 안에 나는 종종 들어가 있다. 환상은 참으로 현상학적이어서 내가 속한 공간의 방위는 언제나 나로부터 겨누어진다. 영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현존재들로부터 참된 공간이 개시되는 것이다. 단촐한 기도처가 예루살렘과 로마의 성전이 되는 meta-morphosis는 티끌과 같은 인간에게 입혀주시는 거룩한 흰 옷과 같다.

빛으로 가득찬 충전성의 경험, erfüllte Intentionalität 

힘이나 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찬양을 할 때 전력질주를 하지 않으면 드려질 수 없는 영광의 무게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미친 달리기는 나의 근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님도 잘 알고 있다. 반대로, 나는 늘 그 무게감 앞에서 무력감을 더 느끼는 편이다. 역설은 그 무력감을 밀고 나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둡지만 빛을 모색하고, 절망스럽지만 희망을 바라는 그 기대는 사실 참된 기억에서 나온 것이다. 나의 과거에 행하신 분이 신실하셔서 미래에도 행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에 대한 믿음은 그래서 진심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고 온 힘을 다해 예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한량 같은 인간이며 에고이스트에 가까운 허물 가득한 작자이지만, 나의 머리에 돔을 씌우고, 나의 다리로 제단 기둥을 삼고, 나의 가슴을 스테인드 글라스로 투명하게 칠하는 분의 기적같은 사랑이 나를 지금 여기까지 오게 했다. 좀 더 그분을 향하게 하고, 좀 더 이웃을 향하게 하는 이 진심은 그래서 나로부터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좀 더 이적과 큰 일에 가깝다. 내가 오늘을 사는 정신의 척추의 무게중심은 우발성으로 가득찬 우주를 조율하는 상수와도 같이 놀랍고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어그러지는, 붕괴의 무한한 거듭을 겪던 이십대 후반으로부터 받은 교훈이 있다. 지금의 바로 세워짐과 충만해짐의 경험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일반적인 것은 특별한 은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세계는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서른부터 나는 신학자가 되었다. 내가 신학교 시험을 치룰 때, 어머니는 내가 빵을 가득 안고 있는 환상을 보셨다고 한다.

내게 주신 빵이 크다. 같이 먹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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