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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의 수기, heart of flesh

jo_nghyuk 2019. 7. 26. 05:34

연구소의 프로젝트 중에 Heart of flesh, not a stone이라고 하는 주제가 있다. 오랜 시간 나는 갈등 해결을 머리로 풀려고 했었던 것 같다. 목사이기도 한 나의 지도교수는 나에게 칼 바르트의 화해론은 설교와도 같아서 갈등 해결을 위한 구체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종종 이야기한 바 있다. 

상호간의 소통은 서로가 위치한 어쩔 수 없음의 실존성에 대한 인정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함께 열려짐의 어떠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고는 도무지 늘 불가능성에 머무르게 된다는 거다. 갈등 속의 두 사람 혹은 집단이 서로를 솔직하게 내어보인다고 할 때, 둘 다 있는 그대로 인정을 받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정 투쟁'Kampf um Anerkennung의 갈등이 서로를 얼마나 더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무력하다는 것을 나는 종종 느끼곤 한다. 인정을 받고자 하는 갈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상대를 인정하기가 너무 어려운 이유는, 내가 사는 삶의 지평이 상대방의 삶을 해석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이상한 해석을 깨기 위해서는 주석가가 되는 자아가 먼저 죽음을 경험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는다. 더 큰 이해를 추구하는 해석학적 순환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자기 반복이 시작된다. 자기 반복이 레파토리가 되는 이유는 자기 동일성이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웅크리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 바깥으로 나아가려면 자기 집을 비워야 하는데, 주인에서 종이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화해 연구를 하는 나이지만,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풀려 하는 때가 꽤 있음을 보고 다시금 부끄러움을 느낀다. 서로가 위치한 어쩔 수 없음이라든가 할 수 있을 수 있음의 없음을 이해하려면, 자꾸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게 말은 쉽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부드러운 맨 몸으로 자갈길을 걷고 가시덤불을 지나는 것처럼 아프단 말이다. 어쩌면 좋은 사회학자는 뜨거운 가슴과 한풀꺾인 자아를 지닌 사람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겸비하면서도 뜨겁다.  

사랑은 자꾸만 밀고 나가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연약함 속에 웅크리고 있는 외로운 개별자들과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것은 맨 몸이 아니고서는, 부드러운 살과 뜨거운 피가 아니고서는 나아갈 수 없는 순례적인 여정과도 같다. 나의 사유는 타자를 지지해주는 기둥이며, 나의 마음은 타자를 품는 자궁이 되어야 한다. 그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이룬 화해의 현실성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창출해야 하는 현실성이다. 화이트헤드를 빌려 말하자면 내가 다른 이의 가능태가 되어주어야 다른 이가 현실태로 살아날 수 있다. 내 밀알이 썩어야 다른 것들의 토양이 되어줄 수 있다. 나는 레비나스처럼 종이에 언어가 아니라 뜨거운 피를 쏟는 철학자가 되고 싶다. 뜨거운 것을 언어에 부으면 그것은 시가 된다. 젊은 날의 나는 차마 시를 쓰지 못해 랩을 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뜨거운 것을 어쩔 줄을 몰라 그냥 게워냈던 건지도 몰라. 

아직도 어슴프레한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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