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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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7월 27일의 수기, benissimo

jo_nghyuk 2019. 7. 27. 20:22

기도하지 않아도 주시는 은혜를 우리는 보편 은총이라고 부른다.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우리 뒤로 지나가버린 (과거화된) 어떤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칼 바르트는 창조주의 창조를 그래서 완료 시제Perfektform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은 분리될 수 없고 그래서 우리 뒤로 지나가버린 시점이 창조라면 하나님은 오늘이나 내일은 현재하실 수 없는 분이 된다. 하나님의 현재는 하나님의 임재Gegenwart이다. 이 임재는 모든 시공의 근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근원적인 무엇'의 추상이 아니다. 추상은 우리가 규정하는 것 옆에 놓이는 무엇일 뿐이다. 반대로 그 근원이 모든 현존재를 규정한다. 내가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규정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자유라고 한다. 특별 은총은 하나님이 자유하시다는 사실에 기반하는 '믿는' 지식이다. 자유한 하나님은 주고자 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고, 이끌고자 하는 이에게 방위를 보여주신다. 모든 현존재는 이끌려짐과 개방되어짐의 벡터적인 경험을 통해서 성취의 경험을 하게 된다.

특별은총은 기대하지 않았던 미래이다. 나의 기대지평에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적인 무엇이 내 삶에 돌입하는 것을 우리는 선물이라고 하고 은총이라고 표현한다. 이 은총적 미래는 현재에 들어와 기억되어진 과거를 만지고 현재를 바르게 미래로 겨누어준다.

나는 특별은총 없이 살 수 없는 기형적 존재이다.

유년시절 머리가 먹먹해질 때까지 어머니와 많이 울었다. 그녀와 나는 슬픔의 동반자였고 오랜 세월을 거쳐 서러움이 반복되면 서러움이 익숙해지는 서러움을 느낀다는 것도 함께 경험해보았다. 사람들의 서러움에 대해, 사회와 민족의 서러움에 대해 나이브한 '미래지향' 따위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이 먹물들아. 너희가 말하는 미래지향은 상호주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아의 프로젝트Projekt의 감옥에 타자를 다시 넣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미래는 인간의 슬픔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며 그 서러움의 친구가 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잊을 수 없는 기억된 과거를 공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동반자로서의 임재이다. 그 부드러운 임재는 나를 침략하거나 강제하지 않으며 옆에서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나에게 자유와 공간을 주고 내가 한 발을 내딛고자 할 때까지 길고 길게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이다. 영의 임재는 열광적인 황홀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는 스스로를 피조물에게 매는 언약을 통해 우리의 파트너로서 오늘도 현재한다. 

은총 없이는 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기도 없이는 숨을 쉴 수 없다는 고백이다. 신앙은 수준이 아니라 사태를 비로소 보는 눈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그 눈이 열리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은총이다. 그 은총을 위해 야곱처럼 밤새 씨름하는 '이기'는 나쁜 것이 아니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통과하는 길로 '특별한' 은총을 택했던 것이다. 야곱의 고집은 자녀로서의 자유였고, 자녀로서의 의지였다. 그러한 '이기'를 부리지 않으면 나는 늘쩡하게 살다가 길바닥에서 객사해버리고 말 것이다. 

나를 강하게 한 것은 고난이다. 

주관의 숲 속에 웅크리고 있던 자아가 경험 세계로 나와 의지로의 승화를 경험하는 것은 분명 고난이다. 이전의 자아나 주관적 이성은 치명상을 입을 것이고, 경험 세계 속의 의지는 힘들이 부딪히는 장에서 피로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무력하게 상대에게 먹물을 뿌려대며 모든 것을 시커멓게 칠하는 개념적인 지식인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서러움이 익숙해지는 서러움을 겪고 있다.  

서러움이 익숙해지는 서러움을 끊어내는 특별은총의 방역을 넓히는 것이, 신학자의 사명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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