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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의 수기, 거인을 굴리는 정열

jo_nghyuk 2019. 7. 31. 23:11

비로소 논문의 본론을 개시했다. 역사적이다. 게슴츠레 책을 읽으며 귀퉁이를 빼곡히 채우는 것은 쉬웠다. 본론의 첫 문장을 쓰는 것이 거인을 굴려야 하는 것처럼 무겁게 다가왔고 그것을 피해 책 겨드랑이 속에서 너무 우래 웅크리고 있었던 듯 하다. 불안하면 자꾸 소품들은 늘려가지만 큰 가구의 조립은 뒤로 미루는 것과 같다. 단상들은 빼곡한데 그것들을 굴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근래 여러 일들을 처리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사이 스스로의 리듬이 망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내부가 단단치 않고 흘러가는 대로 떠밀려서 사는 모양새였다. 

나를 바꾼 것은 다름아닌 한 미니멀리스트 경영자의 책이었다. 그의 일화에 나온 한 노승은 가득 채워진 잔에 계속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비우지 못한 잔에 어떤 것도 채울 수 없다는 깨달음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욕심은 모든 일을 그르치게 한다. 

그래서 '비우기'에 직면하기로 했다. 가장 아름다운 하나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괄호 안에 지양시켜 버렸다. 그리고 크고 아름다운 임재로 들어가버렸다. 

참으로 중요한 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중히 여기던 여러 가지를 놓아버려야 한다. 아마추어적인 주저함은 여기서부터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나를 부르는 것은 중요한 것이고, 내가 뒤돌아 보는 것은 소중히 여기는 여러가지이다. 그러나 현재는 미래와 과거 사이에 끼어져 있는 소박한 점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로 밀려가게 하거나,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모든 실행의 구심점이다.

나의 바깥에서 나를 부르는 부름을 따라가려면 순복적이며 정향적인 질주 외에는 자기반복의 폐쇄적인 순환선을 끊어낼 수가 없다.

우아함은 올곧음과 같이 갈 수 없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가능성을 나는 추구하려 한다. 우아한 자와 투박하게 달려가는 내가 공동 인격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를 부르는 이가 우아하다면, 그를 만나는 나는 얼마든지 투박해도 된다는, 이 단순성의 자유. 부해지려 할 필요도, 강해지려 할 필요도 없다. 부하고 강한 이 안에서 나는 가난하고 약해도 괜찮다. 그것은 다 나의 것이다. 고상하거나 아름다워지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나는 아름다운 당신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부르는 당신을 맹렬하고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 당신은 이러한 나의 맹렬함과 집요함을 격려하신다. 나는 그런 당신만으로 충분할 뿐 아니라 감격스럽게 충만하다. 

나는 굴려지지 않는 거인이며, 이 거인을 당신은 굴리고자 한다. 당신은 내가 아니고서는, 이 거인을 굴리지 못한다. 나는 당신이 아니고는, 이 거인을 굴릴 힘이 없다. 거인을 굴릴 만큼의 정열에, 당신은 늘 목말라 한다. 나는 당신의 의지가 되고, 당신은 나의 힘이 된다. 

나는 느리고 정열적이다. 직선을 그리고자 하지만, 이내 곡선이 그려져 있음을 본다. 

당신은 내 곡선을 우아하다고 말한다. 그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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