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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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9월 11일의 수기, distentio

jo_nghyuk 2019. 9. 11. 08:12

나는 깨지기 쉬운 그릇이다. 그게 금식 중의 나의 고백이다. 사실 금식에의 단행은 사소한 개연성의 틈으로 들어온 우발적 사건에 가까웠다. 지인이 하기로 했(다고 오해했)던 릴레이 금식이 구멍이 나 버려서 그 커다란 공허를 자기가 (뭔데)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지 또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영적 씨름하는 것을 고스란히 함께 체험할 때가 종종 있다. 예배를 인도하기 전이나 공동의 예배에 진입해야 할 때는 몸살을 앓듯이 무거운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부단히 씨름하는 것은 그래서 그저 존재하기 위한 발버둥 같은 것이다. 그리고는 조각 조각 부숴져 시간을 하염없이 땅에 게워내며 연명할 때도 많다. 

쉼 같은 것도 사실 잘 모르고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달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넉넉하게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어림잡았던 게 잘못이었던 걸까. 사실 이 정도로 부숴지고 연약해질 것을 예상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막상 그 피범벅의 실존을 마주할 담력 같은 것이 꽤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존재의 용기란 이심적exzentrisch인 축을 하고 있어서 내 삶의 중심이 탈각하는 아픔을 겪지 않고서는, 나에게 답이 없다는 곤고함! 아, 산산히 쳐발리는 절망의 끝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시작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유니버스.

나는 느리다. 그래서 잘 안다. 나와 같은 자에게 당신은 얼마나 넓은 존재 공간이 되시는 지를. 그런데 눈물겹게도 나는 그 넓은 존재 공간에 준할 만한 자가 되지 못한다는 이 사실이 나를 더욱 절망하게 만든다. 사랑을 받다 받다 못해 이젠 염치가 없이 느껴진다. 나는 저 사랑에 준할 만한 자인가. 나는 염치 없이 감히 희망하지 못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선배들이 픽픽 쓰러져가는 것을 보며, 내가 하등 나을 바가 없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몸서리를 치지만 그 뿐이다. 나는 땅에서 몸서리 치는 지렁이. 그런데 그 뿐이다. 

당신은 넓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작다. 아직도 그러나,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아직도 철저히 박살이 나지 않았다. 휘브리스가 개박살이 나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도 다 깨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겸허는 한계 개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이 영원 앞에서 철저히 박살이 나는 것을 고백하는 것처럼 질적인 한계구분선을 뚜렷하게 긋기 전까지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기력이 있다 없다를 반복한다. 나의 몸이 철저히 타자처럼 굴고 있고 나는 허무한 데 굴복하는 중이다. 나는 감히 생각하는 중이다: 금식 한 번 잘 했다. 성취감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사람은 약함에 의해서만 약함을 수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함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인간 됨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용하기 위해 약한 인간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수용하기 위해 죄인이 되셨다. 그럼에도 그는 십자가를 억울해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예수님의 체휼이고, 긍휼이고, 사랑이었다. 예수는 내 죄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으시다. 

저는 당신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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