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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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9월 13일의 수기, home coming

jo_nghyuk 2019. 9. 14. 01:56

나는 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는 말테 브리게처럼 보는 법을 배우는 편이 아니다. 내 시선이 힘적인 것이 아닌 부드러운 어떤 것에 의해 풀려짐을 경험한 이후로부터, 시선의 변경이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야가 열리는 체험. 역설적으로 그러한 경험은 불안한 자기 존재에 대한 수용에서부터 개시된다. 스스로의 그러함이나 이러저러함에 대해 눈을 감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스탠스 자체가 존재의 허약함을 보여준다. 치달리는 처연함이 강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강함에 대한 사유가 힘과 의지의 층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흩어지는 시간을 끊임없이 끌어모으며 앞을 지향하지만 속절없이 다시 흩어짐을 경험하는 하이데거적 시간의 극복은 힘적인 용기와는 전혀 다른 편에서 기획되어야 한다. 

시간성의 비밀은 만물의 존재함,이 존재하지 않는다,와 근친에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피조된 존재자의 의는 늘 죄와 뒤섞여 있다. 어떤 이는 그것에 대한 투쟁의 순수성에서 의를 구해내려 하고, 또 다른 이는 그러한 현실성을 용인함으로써 존재하는 기쁨을 제물로 바쳐 버렸다. 

세계는 네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의 현실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각은 끊임없이 변경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서?

레비나스의 표현처럼, 참되게 존재한다는 것은 향유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몸부림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으로 되돌아 오는 자연스러운 운동이 그에게는 존재자가 받은 축복이며, 향유이다. Home coming. 집이라고 하는 관념은 평화가 넘치는 현실성에 가장 근접해 있다. 그리스도인이 선취한 가장 아름다운 축복은 연약함에 대한 수용의 경험을 이 땅 위에서 거듭하는 것이다, 매번 집으로 돌아오듯이.

야곱은 일을 저지르고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고, 그때 하나님이 자신의 집이 됨을 경험하였다. (어쩌면 만물의 집은 하나님이 아닐까?) 그는 그 길바닥이 속한 성읍의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명하고 또 다시 험악한 인생을 살아간다. 많은 자녀들을 낳고, 자신을 닮은 (허물 많은) 그의 자녀들이 이러저러한 사고와 사건들을 겪는 것을 보면서, 그는 다시금 out-of-control을 경험했을 것이다. 누가 알았을까, 비극은 코 앞까지 자신의 실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람을 삼킨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야곱을 집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저러함을 자신 안으로 수용하신다. 그래서 고생이 참 많으시다. 그 수용을 위해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화성으로부터 십자가라는 파열음을 스스로 내시고, 인간과 함께 걸어가신다. 이 때부터의 화성은 마치 재즈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혼돈에 질서가 생겨난다면, 그 질서는 혼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야곱이 아버지로서 혼란을 느낄 때, 하나님께서 야곱(이스라엘)의 집의 아버지가 되셨다. 그들의 보호자는 엘-벧엘 즉 하나님의 집에 임재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무언가를 향하고, 겨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본적인 수행이다. 위와 아래, 좌와 우의 구분은 현상학적 인간의 당연한 방위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방위를 하나님은 깨시고, 아브라함-이삭-야곱을 통해 주어진 동일한 축복, 즉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뒤집고, 혼란스럽게 만드셨다. 사람은 그것을 광야라고 부른다. 모든 방향성이 물 속의 잉크처럼 용해되고, 무력감을 느끼는 단독자가 되는 경험. 

시간성의 흩어짐은 그것을 다시 통합하는 임재Gegenwart Gottes와 관련하여서만 출구를 얻고 방향성을 얻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Koexistenz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Ruf이 있을 때에 한해서이다. 야곱은 정직함을 취하여 다시 모든 것을 초기화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새로운 존재로 부르신다. 전적으로 미래적인 방향은, 부르시는 하나님과 맞닿아 있다. 거기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있다. 그는 다시 처음 지점으로 돌아온다. 가나안 땅과 반대 방향인 하나님의 집(벧엘)으로 부르시고, 아버지 이삭의 집(헤브론)으로 부르신다. 그는 가나안으로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애굽까지 당도한 뒤에, 문자 그대로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야 다시 가나안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겸허한 수용과 인정이 인간을 인간되게 한다. 인간이 괴물이 되고, 하나님이 우상이 되는 순간은 언제나 자기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나아가려 할 때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세겜의 아픔을 야곱은 평생 기억해야 했을 것이다. 세겜 땅은 야곱이 넘어서는 안되는 경계 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한계선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ei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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