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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의 수기, 2020년은 백지가 아니다

jo_nghyuk 2020. 1. 5. 05:11

기도원에 다녀왔다. 돌아와서 신년 대토론을 시청했다. 기본적으로 이제 시민들은 보수 진보를 떠나 합리적 사고를 하는 수준에 어느정도 이르른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금식을 하고, 스스로를 맑게 하며 좋았던 점은, 혼탁하여져서 좌우 분간이 안되는 것들에 대한 경계로서 사사로운 유익을 섞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 내가 원할지라도 더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고, 내가 원하지 않아도 더 가야하는 길이 있다. 2020년은 나에게 백지로 주어진 시간이 아니다.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미래는 비어있는 기대지평이 아니다. 미래는 엄연히 존재하며 나에게 접근하고 있다. 그것을 주관하는 자는 낮은 단계에서는 이 세상의 영이며, 높은/총체적인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영이다. 말하자면 낮은 단계에 머물면 혼탁하게 하는 수렁의 씨름을 지속할 뿐이라는 것. 미래는 더이상 희망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주관자를 인정할 때만 평안이 희망을 동반하여 나에게 접근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더 높이 계신 주재에게 부르짖어야만 하는 현존재이다. 인간은 미래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그가 창조주와 함께 하지 않는 한에서.

리쾨르는 자신이 신학자가 아니기에 철학적 사고 안에 스스로를 매어둘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대로 나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사회학적이거나 이 세상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관점들에 대해 매여 있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초월을 향한 문을 여는 것이 신학자의 실존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책무라고 생각한다.  

2020년은 창조주에 의해서 이미 계획되어 있다. 그것은 비어 있는 캔버스가 아니라 오히려 얼기설기 짜여져 있는 구조적인 망과 같은 것이다. 우리 또한 그 안으로 직조되어져 들어갈 것이다. 한정된 상황 속에서만 인간은 스스로를 자유기투할 수가 있으며, 그 밖의 것들은 실재하는 힘과는 무관한, 말하자면 거대한 흐름과는 상관없는 작은 발버둥과 같은 것들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나를 향한 큰 길을 새해의 시작점에서 발견하는 일은 무척이나 값지다고 생각한다. 바르트는 그래서 인간의 시간을 주어진 시간이라 말하는 동시에, 한정된 시간이며, 그래서 시작하고 또한 끝나는 시간이라고 말하였다. 나의 시간은 일분일초가 값비싼 것이 되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그저 흘러가게 놔두어서는 안된다. carpe diem! 나는 그것을 온전히 재배치하고 참된 의미를 향해 정향해야만 한다. 

소셜네트워크보다 자꾸 블로그 공간이라는 외곽으로 살며시, 물러나곤 하는 것은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차분히 스스로가 생각의 결을 정돈해가고 싶은 갈망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애초부터 나란 작자가 그다지 주도적이라거나, 구심점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지만. 다만, 나의 창조주가 나를 주도적인 자리로 몰아넣을treiben 때는 그저 순종해야만 할 것이다. 갈릴리는 내가 선택해서 가는 것이지만 예루살렘과 로마는 가야할 사람이 가야할 때에 가는 것이 옳다.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넣었다'는 부정표현은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라고 하는 긍정표현과 쌍을 이루고 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 사무엘상 2:6-7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을 가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을 하이데거적 현존재라고 부를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실존은 자신이 원치 않는 곳으로 부르심 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기를 주저하며 절제하는 사람이다. 예수가 광야로는 '내몰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만 '인도'받는다 하자. 그렇다면 그는 메시아가 아닐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가장 나고 싶지 않은 곳에서 생을 시작하여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에서 생을 마쳐야만 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아니고서는 그는 도무지 십자가를 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참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2020년은 가고 싶지 않았던 길을 더 많이 가는 해가 되기를. 그것이 나의 외연을 넓히기 위한 포부로서가 아니라 부르심 때문에 스스로가 확장되는ausgedehnt werden 것이기를. 나는 맹목적으로 나를 신장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상존Koexistenz으로서 입을 크게 벌릴 뿐이며, 그의 종으로서 확장할 뿐이지, 향방없이 하지 않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가며 신중하게, 하나님의 허용이 아니라 인도하심이라는 적극적 친교 안에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유익이 걸리면 눈이 침침해지는 법이다. 그러한 부분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다른 유가 없다는 예수의 말씀은 옳다. 자기유익에 매이는 것과 귀신을 섬기는 것은 궤를 같이하고 있는 법이다. 

더 거룩하고 싶다. 

창고와 같이 깊고 무거운 사람이 되기를. 흉년에 큰 유익을 끼치는 요셉과 같은 넉넉한 종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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