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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의 수기, 무거운 것을 가볍게

jo_nghyuk 2020. 1. 14. 01:39

1917/18년에 작성된 후설의 <베르나우어 강연 원고>를 읽고 있다. 1905-10년에 편집된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 강연>에 비해 보다 원숙해지고 풍부해진, 이를테면 한 학자의 사유의 심해 가운데로 자맥질하는 기분이다. 그의 후기 사상까지 추적해 들어가고 있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수압이 높아 저항감이 심하고 속도가 빠르지는 못해도, 매일의 훈련은 나 자신의 압력을 팽팽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자신의 수행능력Leistungasfähigkeit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아침의 설교를 들은 후에, 나는 어느 부분에서 매여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설교를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직선적인 영성으로서 정직이 필요한 동시에 구체적 삶의 정황으로 진입하기 위한 우회로를 또한 차분히 톺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 해석학 수업을 매주 한번씩 들어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매우 관심이 높은 리쾨르의 해석학이기도 하고, 지금 연구하는 시간 현상학적인 요소들이 제법 들어가 있어서 시작했다가, 논문 진행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사전에 읽어야 할 것들에 대한 부담이 많아서, 잠깐 스톱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미련은 많아서, 아티클을 꼭 프린트해놓기는 하고 있다. 그야말로 여력만 되면 멋드러지게 읽어내려간 후에 참여하고 싶은 수업인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후설의 후기 사유에 천착해 들어가기도 시간이 부족하다. 중요한 2차 자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설의 전기 사유부터 차분하게 도면도를 스케치할 줄 알아야 하기에, 한글로도 읽고, 독일어로도 읽고, 독일어로 또 읽고, 하는 작업을 반복 중이다. <시간의식>을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념들>이라고 하는 현상학의 기본 개념들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읽을 때와 다르게 원어로 읽는다는 것은 매우 reell한, 나의 지향작용을 벗어난, 초월자를 조우하는 경험의 반복처럼 느껴진다.

매일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모든 것을 최소화minimalisieren하고, 환경을 최적화obtimalisieren해야 한다.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내가 속한 구조를 새롭게 갈아 엎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무거운 일들이 있다. 스스로를 부단히 수정해갈 각오가 아니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그야말로 엄숙하게 미래적인 일들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To-do list에도, '여력이 되면'이라는 부가조항을 단 것들을 따로 분류해 두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주의를 빼앗겨 가장 해야 할 일을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은 <이념들>을 더 깊게 연구하는 것은 쉬운 문제이고, <논리 연구>라 하는 초기 연구와 <수동적 종합>이라고 하는 후기 연구를 병행하는 것이 더 큰 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도 '여력이 되면'이라는 부가조항을 달 것이다. 욕심은 일을 그르칠 뿐만 아니라, 본질을 흐리게 한다. 본질은 더 잘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기쁘게 그리고 가볍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하는 작업이 결코 가볍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무거운 것을 가볍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창조적 영성이며 실력이라고 여겨진다)

성경이 COE (컵오브엑설런스) 등급의 커피 원두처럼 느껴질때야 비로소 열매의 과육을 벗기고, 세척하고, 원두를 로스팅하고,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즐거움이 동반될 것이다. 그 과정은 무겁지만, 기쁨으로 인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다. '네 짐이 무겁구나'라는 말은 내 과업을 줄여야 함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그 과업을 당신께 맡겨야 함을 의미하는가? 충성은 열심이 아니라 방향지워짐이다. 방향이 확실하면 열심을 내도 괜찮을 것이다. 다만, 그것에 매이지 않게. 무겁지만은 않게. 사명은 부담이 아니라 능력의 부어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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