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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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1월 19일의 수기, you are accepted

jo_nghyuk 2020. 1. 19. 22:31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절대의존의 감정Gefühl der absoluten Abhängigkeit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는 감정을 색채 또는 자발적인 채색으로 본다. 최근에 소콜로브스키의 <후설적 명상>을 읽다가 후설이 <논리 연구>에서 했던 표현에 주목했다. 색은 연장된 것의 (말하자면 공간적이게 된 것의) 국면/계기moment라는 말이었다. 나는 왜 연장된 것의 국면이, 왜 형식적 차원을 의미하는 선이나 면이 아니라 색이라고 표현되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후설이 의미한 결과 다른 방향의 생각이었지만) 우리는 선이나 면을 그것 자체로 파악할 수 없고 검정, 과 같은 색의 매개를 통해서 파악한다. 후설의 표현대로 파악은 감각이라고 하는 매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하자면 간접성이라는 우회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자체의 직접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직접성과 간접성은 서로 뒤얽혀 존재한다.  

그러니까 종교는 감정을 억누르는 어떤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감정을 매개로 우리의 존재를 열어주는 것이다. 느끼는 것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갈망들을 인정하고, 바른 방향으로 정위aufrichten시켜주는 해방적인 것이 참된 종교이다. 갈망의 불은 꺼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억눌려지거나, 발산되어지는 방향 밖에는 가질 수 없는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넘어서는 제 3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나 자신의 저편Jenseits des Ich으로부터 견인되어지는 방향이다. 내 존재의 무게를 내가 감당할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내맡기는 길을 찾아야 한다. 두려움은 사랑의 불을 끄려고 하며, 뒤로 물러나지만, 응답은 우리로 하여금 색채Farbe를 내게 할 것이다. 응답은 빛에 대한 반향resonance이며, 시간 속에서 연장되는 모든 존재자의 자발적인 채색färben이다.

후설의 연구에 따르면, 시간을 통합하는 비밀은 새로운 것을 계속 추구하는 가로지향성Querintentionalität이 아니라, 스스로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시간의 깊이에 가닿아 있는 세로지향성Längsintentionalität에 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통합해 내려면 존재가 더욱 깊어져야 하는 것이지, 축적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무언가를 계속 쌓아올려도, 시간성은 그 쌓아올린 더미를 허물어버린다. 후설이 말한 시간성의 합법칙성은 채워진 것이 비워지고, 비워진 것이 채워지는 상호-얽힘에 있다. 이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끌어모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모여진 것은 흩어지고, 흩어진 것만이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이 찢겨지는 것distentio을 경험하고 있다면, 자신의 존재보다 더 깊은 근원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저편Jenseits에서, 시간 외부에서 통합의 비밀을 찾았지만, 나는 후설 연구를 통해 시간의 심원한 내부에서도 그 비밀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바르트 이후의 신학자들의 영원에 대한 사유는 그것이 시간 바깥이 아니라, 시간 안으로 들어온 초월임을 지시한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일본인인 나의 교수님은 그것을 내월이라고 표현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초월이 어떻게 시간 내재적인가? 그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는 시간 속에 들어온 영원이며, 갈갈이 찢겨지는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시간의 닻이 되어주신다. 모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 그는 말씀하신다, you are accepted. 

내 연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갈 것이다. 나는 시간의 닻에서 다시 시간의 돛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역사성 자체에서, 시간성 자체에서 나는 새로운 방향을 찾을 것이다. 성령은 시간 바깥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갈망을 무시하고 내달리는 것은 성령의 속성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육신됨을 체휼하는 영이며, 모든 연약한 것 가운데 역사하는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의 영이다. 그 영의 인도에는 두려움이나 염려가 없다. 두려움에서 나온 열심에는 열매가 없다. 생동성Lebendigkeit은 주의 영이 가는 방향을 따라갈 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그것은 시간 속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을 어디로 겨누느냐의 근본문제인 동시에, 바로 우리의 그 시간의식이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향이 있는 자만이 본향을 향할 수 있지 않겠는가. 

행위는 존재를 앞서지 않는다. 그걸 나는 자녀됨의 특권이라 부르고 싶다. 

Carrel für Dissertation, 2020년 나에게 주어진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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