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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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1월 21일의 수기, tomorrow's modern boxes

jo_nghyuk 2020. 1. 21. 20:17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다. 철학하는 이들이 왜 좀 미쳐있는 것 같은지 이해가 될 정도로.

아침에 기도를 하는데 근원Urquelle에서 오는 힘이 넘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서관에 와서 개인 방을 빌리고, 후설을 읽어내려간다. 후설의 시간의식에서 과거에 대한 정리를 마치고 현재의 비밀의 장막을 걷는다기보다 그 장막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미래다운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 이 철학자는 죽기 직전까지 철학적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천착하기 위해서는 질긴 탄성이 필요하고, 그래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늘 기도하고 막히면 또 기도하는 삶을 산다. 그러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작업을 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상쾌함을 최근에 느끼는 중이다. 독일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침에 얼굴을 씻다가 하루하루의 반복 자체에서 오는 거룩함에 대해 묵상할 뻔 했다.

하루 자고 일어나니 막혔던 논지가 다시 뚫리기 시작한다. 성간 사이를 유영하며 재배치를 하는 힘이 회복되었다. 후설과 내가 한가지 결을 달리 하는 생각은, 나의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 나의 것Ichliches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구상 속에는 잠 속에서도 의식이 동일성을 유지하며 모든 것을 통합해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 동일성을 유지하느라 그가 죽기 직전까지 철학작업을 수행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잠이라는 것을 통해 분절을 배우고, 시간의 구획을 체험한다. '떨어져 나옴'이 나에게는 휴식이며, 일종의 '차원의 접힘'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전에는 <전체성과 무한>을 읽었는데, 에마뉘엘의 말이 도대체 잠꼬대와 계시 사이에 그물쳐져 있는 기호체계처럼 느껴졌다. 

학자들의 글을 읽을 때면 어쩔 수가 없게도 수용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그런 빙하 사이에 난 협곡과 같은 심연들을 어떻게 보충하는가 혹은 바라보는가에 따라 나는 나이브한 적대자가 될 수도 있고 대화의 상대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전에 한 교수가 나에게 당신의 논문 속 철학자들은 한 사람의 신학자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신학자는 다름아닌 칼 바르트였다) 나는 바르트를 객관적 위치를 지닌 성좌 안의 별로 보지 않고 슈퍼스타로 보았던 걸까. 자의식의 팽창도, 지나친 의존도 사람을 어그러지게 한다. 그 경험은 나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이 그리는 궤적에 홀린 사람은 새로운 궤도에 대해 닫혀 있는 법이다. 지나친 자아의 팽창을 경계할 것. 모세는 선을 넘는 레위인들에게 말했다. '적당히 해라' 

타자의 시선을 적대성으로만 보는 관점은 그래서 정태적이다. 너는 스스로를 상대화시키고, 그 관계망 안에 놓아두고 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본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글이 꿈결같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건 사회학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수기와도 같이 느껴졌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타자성을 동일성으로 환원시킨다. 그러나 존재는 후설적인 현전화를 통하거나, 하이데거적인 염려를 통해서 획득되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향유'를 통해서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이라고."

반대로, 그 '날아오를 수 있는' 역장과 '노동해야만 하는' 환경을 동시적으로 사고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어디서 뜬금없이 날아오는das Neu-Auftretende 어떤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protentional, 그럼에도 종말론적인eschatologisch 방향을 띄게 될 것이다.

 

톰 요크는 몽트뢰 live bootleg에서 스위스인들에게 Ça va?라고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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