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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의 후기, 본인이 스스로를 막지만 않으면 된다

jo_nghyuk 2020. 2. 5. 00:30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레귤러한 삶을 살게 되었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그야말로 삶의 회심에 가까울 따름이다. 기도 중에는 심지어 소홀히 했던 해석학 수업에 다시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감동을 받아버려서, 원치않던 발제를 준비하느라 이번주는 프리저 후설을 만나지도 못하고 해석학 기뉴 특전대와 갑자기 치고받는 혈투를 벌이고 있다. 

쟝 마르크 교수가 발제를 권유할 때 쉽게 가려고 골랐던 영어 텍스트가, 결국엔 다 독일어로 다시 작성해야 하는 일감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논문은 손도 못대고 있다) 가다머와 리쾨르가 순서대로 해석학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전개하는 부분을 끝내고, 이제는 간단한 토론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이 인용하는 학자들과 사상사가 너무 방대하여서, 발제 준비인지 논문 작성인지 알 수 없게 나의 발제문은 각주로 빼곡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밀도가 높은 삶을 살아본 적이 있던가. 독일의 철두철미함도 몸에 어느정도 익었다. 지랄맞은 전문성으로 빼곡한 글도 담담히, 끈질기게 읽는다. (피콜로에게 끌려간 소년 오반이 떠오른다) 감자와 당근으로 만든 식사도 초식동물처럼 순하게 씹어먹는다. 부모와 지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남은 시간에는 노르웨이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무언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어서 큰 은혜로 생각하고 있다. 얼마전에는 도서관 카페테리아에서 직원이 특유의 관료적 자세로 나를 대할 때에도 얼마나 무덤덤하게 넘겨버렸던지.

본인이 스스로를 막지만 않으면 된다. 약해질 때도 있겠지만, 담대해져서 외연을 강하게 넓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때의 유일한 적은 외부의 강자가 아니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자아'이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내가 나에게 훼방놓지만 않으면 된다. 이끌려서 가고 있는데, 어려움이 온다고 포기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 이끌려서 사는 삶에 반기를 들지 않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오죽하면 출애굽기부터 민수기까지 계속해서 '이끌려짐'에 대해 반항하는 백성의 이야기에 대한 경고의 내용으로 가득할까. 말하자면, 나는 이전에 살아본 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이끌려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땐 나를 방해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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