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2월 28일의 수기, 왕관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2월 28일의 수기, 왕관

jo_nghyuk 2020. 2. 29. 01:21

즐거운 삶보다 깨어 있는 삶이 낫다. 즐거운 삶은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만, 깨어 있는 삶은 자신을 포함한 생명세계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후설의 후기 시간론을 지나 상호주관성의 연구에 접어들었다. 그동안은 수기를 쓸 여유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를 하고, 빵을 먹고, 연구를 하고, 감자나 파스타를 먹고, 다시 연구를 하고, 다시 기도를 하고, 밥을 먹고, 쉬고, 밤에 잠에 드는 사이클이 반복된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사이클도 머지않아 끊길지 몰라 미리 수기를 기록해 두는 것이다. 

나는 지향성 연구의 끝이 왜 상호주관성인지 알지 못했다. 후설이 왜 단순한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인지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후기시간연구를 끝으로 상호주관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향하는 지향성이며, 사랑의 몸부림이며,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윤리적 삶에 정향되어 있다는 것을. 너는 나에게 돌연히 나타나기도 하며, 내가 너를 붙잡기 위해 나를 내뻗기도 하는 이 모든 수동성과 능동성(지향성)의 운동은 사랑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의 말년의 원고에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이 상호주관성의 목표처럼 등장하는 대목에서 참된 그리스도인 철학자의 소명 같은 것을 느꼈다. 죽기 직전까지, 병상에 누워서도, 휴가 중에도 그가 천착했던 현상학은 마침내 사랑의 윤리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많은 후설의 연구자들도 이러한 그의 후기 저작에서 드러나는 윤리에 대해 입을 모으고 있다)

신앙이 윤리적이라는 말은,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이라는 말의 동어반복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우리는 그 사랑의 충만함Erfüllung을 찾을 수 있다. 혼란한 시대 속에 교회는, 마땅히 사회적으로 정향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사회와 동일시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닐 것이다. 후설은 깨어있는 개인의 몸부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 있어야 그 몸부림들이 모여서 윤리적 삶의 일치를 이루어낼 것이다. 그러나 그 몸부림Streben을 위해서, 깨어있음Erwachen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를 향하는 몸부림/지향성인지를 알아야, 그 구심점을 통해 사회를 향한 원심력을 분별있게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은 기도하는 리듬을 전제로 하며, 그 리듬을 알아챈 신앙인은 자기희생과 이웃사랑의 몸부림을 통해 하나의 세계 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하나이며,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져 있다. 창궐하는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는 동시에, 구체적으로 막아야만 한다. 다 할 수 없는 동시에, 전력투구를 해야만 한다. 왕관이라는 이름을 바이러스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승리가 그리스도에게 영광의 면류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상호주관성 너머에 있는 한계개념Grenzidee을 우리는 다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시간 너머에 있는 영원이 아니라, 상호주관성 가운데 있으며, 또한 상호주관성 너머에서 그것을 미래로, 절망의 미래가 아니라 희망의 미래로, 낙관주의도 비관주의도 아닌 약속되어진 것의 성취로 이끌어내는 한계개념으로서의 영원. 시간 속에 들어온 영원. 육신이 되신 하나님. 우리를 시간 '속에서', 그러나 '옛' 시간에서 '새' 시간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초월성에 대한 감관이 회복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눈이 열려서 보여야만 한다. 보는 사람만이 어둠에서 빛으로의 방향성을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정신은 그리스도인에게 의사소통적인 동시에 예언자적이게 될 것을 그래서 요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교회의 너머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이웃으로서, 교회가 함께 속한 하나의 세계로서 사회를 바라보고 섬겨야 하는 것이다. 

바이마르 중앙역 풍경,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어느 바이마르 학파 화가.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