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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의 수기, 기억의 방향에 생명이 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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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의 수기, 기억의 방향에 생명이 있다

jo_nghyuk 2020. 3. 5. 23:44

지난 주에 후설에 관한 연구를 마쳤다.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몸에 무리가 왔다. 새벽에 겨우 일어나 욕실까지 당도했다가 침대로 돌아왔다. 독일 신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들은 끝의 끝의 끝까지 사고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비관의 트랙을 끝까지 달린다. 아는 것이 힘인지, 아는 것이 독인지 알 수가 없다. 그보다 슬픈 것은, 이 정도의 지성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해 (하다못해 자국민이라도) 사유하는 대목을 기사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이데거적인 나의 죽음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나의 죽음을 선취한다. 나는 나의 죽음을 앞당겨 본다. 나는 그것의 불안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극복한다, 등등. 강한 나의 곁에 약한 이가 없다. 

거리를 걷다가 독일 꼬마들이 코로나, 하고 놀리는 것은 일상과도 같이 되었다. 대상이 남성이 아닐 때 사람들은 더 비열해진다. 특별히 빈곤한 계층이 더 유난을 떤다. 약한 사람이 약한 사람 등을 떠민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가 스스로가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위로도 아니고, 용기도 아니고, 끝의 끝을 달리는 냉정한 신문 기사 조각처럼 느껴진다. 

수요 예배를 인도할 체력이 되나, 기도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내가 도와줄게, 한 번 해보자'

십 수년 전에 나에게 말을 걸어왔던 당신의 음성과 같은 목소리. 지친 연약한 나에게 산책하자고 했던 당신. 느릿느릿해서 슬픈 나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법을 가르쳐준 당신. 이제는 당신을 앞질러 달릴 때가 너무 많고 부끄러움을 느낄 줄도 모른다. 

다시 나사를 풀기로 한다. 하이데거로 가기 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장을 다시 다듬어 고치기로 한다. 글을 읽다 문득 효율적인 스스로의 시선이 부끄러워진다. 이 도굴꾼과 같은 눈으로 무얼 훔치려고 하는지. 

하이데거,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를 앞질러 있는 미래적 존재라고 말했지. 그런데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때면 등이 떠밀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나를 앞질러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스스로 멈출 수도 있는 존재이다. 브레이크가 없는 인간만큼 위험한 존재가 있을까? 미래에서 나를 부르고,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을 뿐, 나 스스로가 나를 앞지를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런 위험천만한 능력은 나와 세계를 소외시킬 뿐이다. 

오히려 시간성이란 영원한 현재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넓은 공간 안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나는 이 넓은 공간에서 지나간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기억의 창고에서 하나하나 꺼내어 볼 생각이다. 지금은 뭔가를 기대할 때가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찾아내서 기억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런 기억 작업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참회라고 불렀다. 회개는 그런데 끄집어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직해질 때 터져나오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하이데거의 글은 읽고 싶지도 않고 지금의 나로선 읽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를 건너뛰는 우회로 같은 건 없다고 또한 생각하는 바이다. 오히려 그 심연에 맞서서 이겨내는 능력이 나에게는 필요할 것 같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내게는 필요하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 없이, 죽음을 말하는 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죽음은 내가 기억하는 곳에 있지 않다. 내가 기억하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 오히려 하이데거적인, 나를 앞질러 있는 그 기대 방향에 죽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춰서서, 기억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자취를 다시 기억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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