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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의 수기, 뉴 암스테르담

jo_nghyuk 2020. 3. 8. 20:49

사람이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도서관에는 큰 창이 나 있어서 연구를 하는 동안은, 계속 빛을 볼 수가 있다. 나는 거실에서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게 빛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건물의 창만큼이나 큼지막하게 난 창문으로 들어오는 채광이 기분을 산뜻하게 한다. 하이데거는 환경에 던져져 있는 것을 정황적인 것과 기분적인 것을 모두 표현하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인간은 기분적 존재이고, 그 기분을 통해 존재를 개시하기 때문이다. 감성적이라는 것이 덜 이성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건, 그냥 신경다발이 더 풍성해서 괴로운 것 뿐이다. 

독일 사람들은 정초한다,는 표현을 참 좋아한다. 건축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이 표현은 스스로를 어디에 놓아둘지에 대한 고민을 이 사람들이 늘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에게는 근원적 자유가 있고, 일반적 자유들이 있다. 근원적 자유를 어찌하지는 못하지만, 일반적 자유, 그러니까 몸부림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을 어찌할 수는 있다. 나는 창이 나 있는 곳에 있을 수도 있고, 침대에 그저 누워 있을 수도 있다, 등등. 세계라는 독일어 단어 Welt에 주변을 아우른다, 둘러본다, 는 함의를 가진 접두어 Um을 붙이면 그래서 환경세계라는 단어가 된다. 나를 두르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조성하느냐에 따라 나의 정황과 심정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어젯밤에는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알아보았다. 어머니는 내가 미국 유학을 갈 것이라 환상을 보신 일이 있다. 지금 나는 독일에 와 있지만, 그에 대한 흥미로운 부채의식 같은 것이 내게는 남아 있어서, 콜로키움 학회 참석 차 유학 중에 한 번은 꼭 프린스턴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생각보다 사람에게는 많은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근원적 자유에는 권능에 가까운 힘이 필요하지만, 일반적 자유에는 작은 힘이면 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 작은 힘은 몸부림이며, 내뻗음이며, 신음이며, 그래서 기도이다. 

흘러간다, 는 라틴어는 transit이다. trans-ire에서 온 말일 것이다. 그건 건너-간다, 는 뜻이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처럼 표현한다. 그건 아마 우리의 기억이라는 창고에 경험들을 쌓아놓고 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경험한 것을 통해서 미래로 건너가고 있는 중이다. 과거는 소실되지 않았고, 다만 내가 과거로부터 미래로 건너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의 Modus, 즉 존재하는 세 겹의 양태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단절한 사람은 외로운 현재에 가루처럼 박혀 있다.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운동을 모른다. 과거는 나의 지금에 가르침을 주고, 미래는 나의 지금에 방향성을 줄 것이다. 인식하는 사람은 다가오는 미래를 받아 현재에서 과거로 흘려 보낸다. 행동하는 사람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왔기 때문에 여전히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내가 나를 인식할 때, 나는 던져져 있지만, 내가 나를 행동하게 할 때, 나는 나를 던질 것이다. 

뉴욕의 옛 이름은 뉴 암스테르담이었다. 말하자면 뉴 암스테르담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도시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를 향할 수는 없다. 내가 과거에 경험한 것을 계속 지향한다면, 나는 빙글빙글 내 안으로 구부러지고 말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환경세계Umwelt 또한 변화하고 있다. 어제의 서울과 오늘의 서울이 다르고, 어제의 암스테르담과 오늘의 암스테르담이 다르다. 경험한 것을 토대로 나아가면서도, 내가 기대하는 것의 지평 또한 계속 달라지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기대지평에는 뉴 암스테르담이 있었지만, 실상 경험하는 현실 안에서 그것은 뉴욕으로 수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 수정하지 않으면, 과거로의 무한퇴행이 시작된다는 것은 후설의 시간에 대한 통찰이 주는 귀한 교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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