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3월 17일의 수기, 참회록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3월 17일의 수기, 참회록

jo_nghyuk 2020. 3. 18. 06:56

간밤에 꿈을 꿨다. 분명 그건 영적인 대적자였고, 나는 능력이 딸려서 힘을 떨치지 못했는데 그 기분이 여간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집에서 논문을 쓰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글을 다시금 정리하고, 다듬으면서 이 사람이 왜 성인으로 불리우는지 깊이 체감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려움에 당하거나, 심지어 지적인 곤경에 처할 때조차 기도하는 부분에 대해 교수님이 연구하라고 하셔서 그가 기도하는 대목들을 고백록에서 찾아보았는데, 세상에, 멀미가 날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늘 기도를 통해 자신이 존재론적인 곤경을 늘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읽으면서 반성을 넘어 회개를 하게 되었고, 그게 코로나 사태를 통해 선배 목사님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회개의 때'라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 맞닿아 있는지 절감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열정은 그에게서 종종 하나님을 향해 불타오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불이라는 건 성령의 임재를 묘사하는 동시에, 불이 가진 상승의 방향성을 고려해볼 때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동시에 불은 언제나 사랑으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이 거칠게 서로 얽히고 얽히며 타오르는 그림처럼 보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이 그토록 순결하고 강렬하게 불타오를 때까지 기다리셨다. 기다리고, 기다리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작금의 교회가 드리는 사랑이 아니라는 선배 목회자의 말이 가슴을 때렸던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사랑에 불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에게는 불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불이 없다는 유약한 고백. 그 미지근함 앞에 하나님이 성전 문을 쾅하고 닫아버리실 때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생각보다 매우, 아주 매우, 무겁고 순결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사랑 밖에는 길이 없다. 그러나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는 하는 것이다. 그때에도 그는 불길한 예감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예감은 양심에서 나온 것이다: "너를 갖다 바쳐라" 다시 말하면, 그게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야 함을 의미한다. 맹점이 여기에 있다. 아까워서 남겨둔 그것이 나를 망쳤다.

하나님의 인내는 그것을 참고, 또 참으시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참된 사랑의 의미를 종종 오해하고, 이용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이 마치 괜찮아서 참으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죄의 문제를 유예된 종말론처럼 다루며 미루고 또 미룬다. 그러나 우리가 잊은 것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불이 매우 극력하게 불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암시된 종말, 재앙, 파국, 묵시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죽음처럼 맹렬한지를 지시한다. 하나님의 열정은 우리의 감성적이고 심리학적인 위안과 위로들을 짓밟고 깨부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놀라 외칠 것이다: 이게 하나님었단 말인가? 이게 진짜 하나님이었단 말인가? 그럼 내가 그동안 믿은 것은 무엇인가? 신자들이 안일해질 때마다 그런 자유주의적 방만함에 철퇴를 내리치는 로마서가 역사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연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감각을 상실할 때, 거룩함이 상실된 이상한 은혜의 개념이 자리잡게 된다. 그 은혜는 이상하게도, 우리를 거룩함을 이끌지 않고, 죄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불타오르며, 애를 쓰며, 울부짖으며 곤경과 어려움들을 극복해나갔다. 그건 늘, 기도의 정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기도는 쉬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뼈를 깎았고, 그에게 위안을 주기보단 그의 심장을 쪼개었으며, 그를 안전지대에 두기보단 실존을 위태하게 만들었다. 기도할수록 그는 삶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유혹이 사람의 영혼을 얼마나 검게 썩어들어가게 하는지, 탐욕과 방종이 얼마나 병균처럼 폐부에 파고드는지 몸서리치며 깨달았다. 거룩함에 대한 소름끼칠 정도의 예민함은 분명, 성령에 의해 주어진 감각이었다. 그 감각이 무뎌져가는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방만함 때문이었다. 방만함에 기울어진 인간은 그래서 교만하고, 하나님의 책망도, 이웃의 책망도 듣지 않는다. 내가 스승으로 여기는 자들 앞에 지금 가서 당신이 나의 스승이라고 부르면, 그들은 기뻐하며 고마워할까? 그들이 영적인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이든 던지며 집어치우라고 외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기쁘게 하는 데에 목표를 두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사랑을 얻는 것보다, 나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해 정위치되는 것을 훨씬 비교도 안되게 기뻐할 사람들이다.

기도는 위기의 체감이다. 그 위기의 다른 이름이 나라는 것을, 어서 깨달아야 한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파국이다. 인간의 위기는 그 파국에 대해 눈이 멀고, 자신의 죄를 후회는 하지만, 미워하지 못하고 부여잡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인내하는 부드러운 하나님의 성품을 끝까지 소비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절제를 통해 하나님에게 집중한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던 많은 것들을 절제한다. 군사는 자기 일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사령관이 그의 일을 돌봐줄 것이다. 

고백록을 읽으면 읽을수록, 아주 조금만 일이 잘 풀려도 자고해지는 나와는 너무도 상반되게, 그가 늘 모든 찬양과 영예를 주님께 돌리고 있는 모습에 부끄러워질 따름이다. 조금만 일이 꼬여도 시무룩해지는 나와 다르게, 어떤 어려움도 주님 앞에 가져가 기도의 동력으로 불타오르는 그의 모습, 그리고 앞에 놓인 모든 것을 관통하고야 마는 그 사랑의 뜨거움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사랑의 문제였다는 데에서 가장 큰 부끄러움을 느낀다. 간음의 우상을 창으로 꿰뚫었던 비느하스의 열정은 하늘까지 미칠 정도로 드높고 거세게 타오른 불덩이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 정도의 열정이 필요했다는 것을 내가 몰랐을까? 모든 것을 사를 정도의 불이 되어야 하는 것을 몰랐을까? 아니, 조금 더 쉽고, 조금은 즐겁고, 조금은 더 스무스한 것을 찾다가, 아까운 것을 뒤로 빼고 숨기고 가리고 아끼다가 내 살이 썩었고 뼈가 녹아내린 것이다. 

지금은 회개해야 할 때이지, 자신을 즐겁게 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사순절이지, 부활주일이 아니다. 부활주일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너는 사순절에 남김없이 부끄러워하고 회개해야 한다. 이 길은 결국 외로운 길이며, 친구를 찾을 그런 도정이 아니다. 영적 동반자는 이 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처절하게 외로운 이 길의 끝에 다다라야 비로소 나의 주님을 만나리라. '네가 정말로 나를, 나만을 사랑했구나. 여기까지 와주었구나'

불뱀, 불뱀, 불뱀... 불이 번지고 있다. 불이 옮겨붙고 있다. 이 불을 누가 끄겠느냐? 물으시는 것만 같다. 오늘이 나의 변곡점이 되길 기도할 뿐이다. 

참회록의 표지, 주황색. 희망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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