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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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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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_nghyuk 2020. 3. 23. 06:41

어쩌면 나를 철저히 외롭게 만드시는 그분의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져서 이 시간을 계기로 조금 무거워지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이해는 자신의 환경과 구조와 역사의 구성물이다. 다른 이가 나를 다 이해해줄 거라는 생각은 그래서 나이브하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이 내 외로움의 원인이라면 나는 나를 알아주지 않을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가. 내 동기가 온전한 데에서 나왔다면 왜 나는 그것을 무지함 앞에서 증명하고자 하는가. 그러한 노력 또한 인정욕구에 기울어진 온전치 못한 마음일 뿐이다. 가끔 답은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일 때가 있다. 

이렇게 철저히 외롭고, 실망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를 나도 모른다. 그러나 당분간은 철저히 실망해보아야 함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놓쳤던 것을 얻을지 모른다. 충분히 진지해보지 않아서, 그렇게 죽음을 늘 회피하려 해서, 느긋한 여유 가운데 늘 스스로를 놓치고 살아서, 이러한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일지도. 불편한 것을 피하기만 하면 정말 본연의 것을 놓칠지 모른다. 마음을 쇄신해서, 철저히 더 단독자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내가 가진 최대치의 메타인지는, 내가 지금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올바르게 보이던 길이 가장 큰 독이 되었다면, 태세전환이 필요하다. 그건 때가 변해서 그런 것이다. '살릴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한 온전함이 들어맞지 않는 차원에 들어서 있다면, 생각의 재구조화를 위한 해체가 필요하다. 인식적인 차원이 아니고 실존적인 차원에 나는 끼워져 있어서, 그건 참 아프고 마음이 상하는 일이다. 겸비함은 투명한 인격이 아니라 피흘리는 상처받은 인격의 열매다. 회개의 열매는 어쩌면 상한 심령 자체일수도 있다. 회개의 열매는 의로움이 아니라, 나의 자의성이라고 하는 마음이 철저히 썩어서 무릎꿇게 하는 것이다. 썩은 것은 토비가 될 뿐이다. 싹이 자라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이시다.

지금의 나는 아카데미에서도, 신앙의 사람들에게서도, 지인의 인정이나 가족의 사랑에서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길이 너무 안일하고, 편협하고, 가볍고, 곧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이라고 하는 초월자에게 간단하게 건너뛸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라고 하는 근본 질문이 다시 물어져야 한다. 오늘 이 때에 나에게,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죽이시는 분이신가, 살리시는 분이신가? 허용하는 분이신가, 분노하는 분이신가? 어쩌면 변증법적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과 저것을 시간적으로 정직하게 다 거쳐야만 제 3의 답이 나올 것이다. 지독한 우회로를 거쳐야 그 답은 나의 것이 된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는 다시 괄호쳐져 있다. 이 무게를 진지하게 감당하고, 피를 흘리면서 가야 답을 얻을 것이다. 이 질문의 답은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라 실존범주이다. 네가 무언가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더 보여서 그 답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진력하라고 바울은 조언했다. 하나님이 그것도 새로이 네게 보이실 것이다. 

애들 장난이 아니다. 생명 걸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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