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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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의 수기, 느려진 세계

jo_nghyuk 2020. 3. 27. 03:48

한 미래학자는 말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는 느려졌다. 앞으로의 삶에서 사람들은 더 적은 것을 가지고 잘 사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라고. 그는 왜 바이러스로 인해서야 비로소 우리가 자동차 이용을 비롯한 환경문제에 있어 잠시 멈출수 밖에 없는지 반문하였다. 가속화되던 세계가 겨우 느려졌고, 사람들도 아주 느리게 적응 중이다. 

비자를 받으러 관청까지 걸어서 갔다 돌아왔다. 아마도 몇달간의 삶은 계속 이렇게 느릴 것이다. 논문이 진행되던 속도도 느려진다. 이상한 말이지만 시의적절하게 하이데거를 읽고 있는 기분이다. 그는 세계가 위협적으로 덮쳐오는 것의 현실성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이성적인 동물이어도, 자기 기분에서 출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이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그 기분을 과소평가하거나 뿌리칠 수는 없다. 느려진 나의 리듬이 속이 터질지언정,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거기서부터 기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거리두기는 친밀함의 다른 깊이이다. 누군가 나의 속도에 대해 속이 터진다면, 그와 거리를 두는 일은 매우 건강한 일이다.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지난하게 느려터진 시간성을 직면하는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단순히 홀로있음의 깊어짐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서 확보된 거리를 가지고, 관계성에 대해 보다 성숙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는 일이다.  

얼마 전에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스타크래프트를 한 판 했는데, 1:1:1:1의 구도였다가, 한 사람에게 힘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형세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1과 임시협정을 맺은 3들의 대결로 전환되었다. 놀라운 것은 압도적인 일자가 쓰러지자, 다자는 그 어떤 토론의 과정도 없이 당연히 거기서 경기를 멈추었고, 우리들은 경기 리플레이를 보면서, 음성 그룹채팅을 통해 경기의 양상에 대해 분석하면서 온라인 모임의 끝을 맺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나는 커피 머신을 다시 잘 사용하게 되었다. 그건 역설적이게도 아침 일찍 밖에 나가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루틴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아침에는 시리얼을 먹거나 베이컨을 구워 스크램블 에그를 먹는다. 며칠에 한번은 새로운 파스타 레시피를 만들어본다. 오래된 커피 원두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 산 치보의 아프리칸 블루를 내려서 마셨다. 해가 많이 뜨는 날이면 발코니에 의자를 옮겨 놓고 아내와 꽤 오래 해를 쬐고 앉아 있는다. 논문 연구의 시간은 길지 않다. 그래도 나를 채근하지 않기로 했다. 기도는 예전처럼 조용하게 한다. 집에 있게 되면서 먼지 쌓인 기타를 다시 잡고 찬양하는 시간을 보낸다. 주석 없이, 그래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읽어내려간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세계 속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에 접해 있고, 세계 속에 짜여져 있다. 우리는 단순히 세계 안에 놓여져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늘 직조되어져 있고, 세계의 닥쳐옴 속에 밀쳐져서 시작한다. 세계가 이렇게 서로서로 비근하구나, 하고 느끼는 오늘날이다. 어느 한 나라가 방역을 잘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다 함께 치솟는 발병의 수치가 가라앉아야 한다. 특별히 가난한 나라는 치사율이 더 높다. 내가 이러한 세계 속에 짜여져 있는 존재라면, 단순히 나의 물리적 위치를 독일에서 한국으로 옮겨다 놓는 것만이 단 하나의 대안은 아닐 것이다. 느려터진 독일, 느려터진 사람들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것이다. 커피를 내리고, 파스타를 만들고, 휴지를 쓰고, 며칠에 한번씩 마스크를 쓰고 장을 보러 나가고, 발코니에 앉거나, 아내와 드라마를 보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하이데거를 읽고, 본회퍼를 읽고, 기도를 하고,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때로 늦게 자고, 늦잠도 자고, 그렇게 느리게 살 수 밖에 없다. 미래학자의 말처럼, '이제서야' 우리는 느려진 것이고, 느려진 것을 가지고, 더 적은 것을 가지고, 잘 사는 법을 느리게 익히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비사회적으로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더 사랑하는 것이다. 세계의 중력이 변화했을 때에는, 시간도 따라 변화한 것이기 때문에 애쓸 필요가 없다. 너는 이 시간 속에서도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늘 자조적으로 바라보던 저 빌딩 숲마저도, 요즈음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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