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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의 수기, 세계는 실존범주이다

jo_nghyuk 2020. 3. 28. 19:29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는 것은 상호주관성의 단초가 된다고 후설은 말했다. 편한 삶을 사는 이는 그래서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오직 아파하는 사람만이 뚜렷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의문의 모호성 때문에, 그 '앞서 있음의 실존' 때문에 그는 그래서 더 아프게 될 것이다. 이해하게 되는 자는 더 오해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파할 필요가 없었지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아파하는 하나님이 되셨다. 본회퍼는 이런 맥락에서 오직 고통을 겪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세계의 아픔에 대해 닫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의미에 다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십자가의 아픔은 세계의 아픔에 대한 하나님의 열려짐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랑클 박사는 자기 초월이란 개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밝혀 내었는데, 그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 주면서 비로소 자기 초월이 이루어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생에서 의미를 발견할 때 살아갈 용기와 힘을 가진다. 그걸 희망이라고도 말한다. 자기 초월은 자기에게 집중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고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작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자기 초월을 말하지만, 그건 자칫하면 자기 반복이 될수도 있다. 하나님도 '이웃'이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타자이며 이웃이라는 사태관계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왜 많은 교회는 정작 세계라고 하는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인가. 세계는 극복되어져야 하는 적대자가 아니라 화해되어져야 하는 이웃이다. 그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더 많은 진지함이 요구되어지고, 더 많은 이웃 사랑이 새 계명으로 주어져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철저하게 외로움의 길을 걸어가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이웃이다. 외로운 사람들이다. 다윗과 같이 철저히 오해를 받고 병상에 누워보고 심령이 상하여지고, 그러한 의미에서 정직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음을 알게 될 때, 어려운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웃 또한 인식하는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라, 실존범주이다. 공감은 단순한 심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타자와의 하나됨 (화해됨)에 대한 존재론적 단초이다. 바울이 말하였듯 내가 정신이 온전하여도 이웃을 위한 것, 미쳐도 이웃을 위한 것, 강해도 이웃을 위한 것, 약해도 이웃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내 평생의 외롭고 가난하고 아픈 길에서 얻은 이 신앙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오해한다고 해도, 나는 이 사랑의 길을 아파하면서 걸어갈 것이다. 

몇 년 전에 철학 교수님께서 나에게 어떤 신학자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이 나의 신학적 성향을 파악하려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칼 바르트와 결별한 몰트만을 가장 좋아한다. 신학 뿐만이 아니라, 신학하는 사람으로서, 같은 신앙인으로서 나는 위르겐 몰트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가 아무것도 아닌 내 손을 잡아줄 때의 그 온기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세계는 현상이 아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이며, 우리의 상호적 실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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