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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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5월 22일의 수기, EXISTENZ

jo_nghyuk 2020. 5. 22. 19:23

참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쓰는 것 같은데 이 공간에는 뭔가 나 자신이 정돈되지 않으면 쓰기 힘든 역장이라도 발동되는 건지 글을 쓸 엄두가 흐트러져 있을 때에는 나지를 않는다. 스스로를 추스리고 나서야 뭔가를 쓸 기분이 든다. 

알람도 맞추지 않고 열시, 열한시에 일어나는 삶을 한 달 정도 지속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6시에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아마 크게 뭔가를 내면에서 전환하고 나서 그게 시작된 것 같다. 그런 순간들은 위기이기도 하고 모멘텀이 되기도 한다. 이겨내면 치고 올라가지만, 겪는 중에는 그냥 앓는 느낌밖에는 없다. 앓고 앓다가 어느 순간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나라고 하는 전체가 다시 새로운 구조로 탈바꿈하는 듯한 그런 경험을 반복한다. 이 과정이 삶에서 수천번은 반복되는 것 같다.

인식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사람은 이해하는 대로 이해되어진 세상을 살 수 밖에 없다. 미운 것이 있으면 세상은 괴롭고, 버거운 것이 있으면 세상은 참 무겁다. 그 이해의 틀을 벗어나는 길은 없다. 머리 깎고 도를 닦든지, 이해 구조 전체를 재구조화하는 아픔을 겪든지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작은 이해의 구조 안에 여전히 비대해지는 몸을 가지고 소라게처럼 머물러 있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마냥 현상학적인 방향으로 거슬러올라가서 그래, 그런 것이다 껄껄, 하고 웃을수도 있고, 해석학적인 전진을 통해서 불편함을 직면하며 울 수도 있다. 두 방향 다 잔여로서의 사각지역이 존재하고, 인식과 존재의 정리벽 같은 것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나는 자꾸 그 불편한 로프반동을 시도하며 산다. 

대체로 삶이 정갈해지고는 있다. 6시에 일어나면 기도하러 잠깐 무릎을 꿇었다가, 커피를 내리고 책상에 앉아 조용히 그리고 멍하니 묵상을 한다. 간단하게 주석도 찾아보고, 몇 글자 적는다. 간단한 과일을 먹으면 8시가 조금 지나는데, 프랑스어나 히브리어를 아주 가볍게 연습하는 것으로 애피타이저를 살짝 하는 것이 아침부터 하이데거의 글 같은 것으로 부대끼는 육식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덜 부담스럽고 좋다. 그렇게 예열되고 나면, 신문을 조금 읽고, 음침한 하이데거의 글을 읽어내려가고 글을 쓰고를 반복한다. 하이데거 아저씨 만나기 전에 예수님 만나고 들어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죽음, 죽음, 죽음, 책임, 책임, 책임. 상당히 스토익한 이 실존주의자는 네 내면을 먼저 완성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이 맞다. 마음을 빼앗기면 가진 소유가 많아도 늘 근심에 젖어 있다. 마음이 분산되면 영혼이 현재에 머물러 있지를 못하고 늘 어딘가로 쉬지 못하고 향하고 있다. 결단이라는 단어는 실존주의 뿐만 아니라 설교 단상에서도 꽤나 울려퍼지고 있는, 현재의 회복에 대한 촉구이다. 

대체로 정갈하다는 표현은, 사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속이 그다지 정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을 정성스럽게 세팅해놓고 살아도, 하루만 지나도 흐트러지는 것이 인간이다. 책상 앞에 작은 라벤더 화분이 있는데, 주기적으로 흙이 건조하지 않은가 손으로 꾹꾹, 만져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속이 흙으로 가득 차 있는 기분이 든다. 의지에는 이끼 같은 것이 껴 있다. 뒤로 가기는 싫은데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서 기도하며 생각하는 것을 다 말한다. 정말 사소한 것까지 요즘에는 기도에 등장하고 있다. 기도가 씨름이라고 하는 이유는 내가 나와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처럼 나의 고집과 하나님이 씨름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그런 기도가 가능해서, 참 다행이다. 

나는 느긋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에게 중요한 것은 느긋하면서도 하나 하나 단순하게 해나가는 리듬이다. 공간과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할 수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한정해 두어야 한다. 미니멀리즘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게 내 방향을 잘 정돈해주기 때문이다. 많은 것이 내 마음을 잡다하게 하면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솔로몬도 말했다. 차라리 조금 적게 가지고 마음을 지켜내는 편이, 성을 얻는 것보다 낫다. 그런 점에서 지독한 하이데거 아저씨의 말도 맞는 말이다. 내 마음에 이끌려 사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대로 이끌려 사는 것과 동의어이다. 거기에는 마음을 지키는 주체 같은 것은 없다. 나를 이끌고 가는 내 마음대로 살아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적절한 통제 감각의 능력에서 자유함이 있는 것 같다. 

이상하다. 자유는 누리는 것과 누리지 않는 것 사이에 위치하는 것 같다. 누려야 하는 것은 매인 것이다, 라고 현상학자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초연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것도 불쌍한 일이라고 해석학자는 진단해줄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진자운동하는 실존이다. 한 시대 속을 살고 있고, 한 사회 속을 살고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그래서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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