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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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5월 29일의 수기, 시간의 라이트 로스팅

jo_nghyuk 2020. 5. 30. 01:16

하이데거를 계속 읽고 있다. 이 해석학자는 아는 것이야말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외친다. 우리는 그냥 살지 않고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기반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해의 폭이 넓으면 더 멀리 갈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슬퍼할 수도 있는 것이다. 

행복은 외재적이지 않다. 성경도 중요한 것은 영혼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감사는 생동성으로 가는 뇌관을 건드리는 일이다. 무엇이든 집착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고 자유롭지도 못하다. 히브리인들은 사람의 중심을 콩팥이라는 재밌는 말로 표현한다. 사람의 총체는 머리에 있지 않고 저 깊은 심연 속에 처소를 두고 있다. 

아내가 임신을 한 후로 나에게는 한 겹의 정체성이 더 생겼다. 그건 바로 아내가 하던 모든 일들이다. 나는 남편으로서 존재하고, 학생으로서 존재하고, 아내가 행동하던 모든 것들을 대신 행동해야 하는 투명한 행동자로서 또한 존재한다. 예전의 피곤함은 공부를 많이 해서 오는 몸에 독이 퍼진 듯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전반적으로 그냥 졸리운 존재가 되었다. 자꾸 졸린 것은 몸이 과부하를 스스로 걸어서 쉬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한다. 그럴 때는 그냥 무리하지 않고 편안하게, 느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코펜하겐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덴마크 사람들이 라이트 로스팅을 좋아하고 바디감보다 열매 맛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지인의 표현으로는 산미가 있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향이 끝나버리는 미묘한 밍숭맹숭함이다. 그래서인지 두세잔 마셔도 카페인으로 인한 부담이 별로 없다. 큰 창 앞에 앉아 해를 쬔다. 발코니 공사 중이라 쇠파이프와 목재들 사이로 겨우 채광이 들이치는 곳에 앉는다. 

문득 모든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이가 적든 많든 이런 저런 사회적 위상을 다 걷어내고 그냥 불쌍한 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 자꾸 울고 싶어진다. 칼 바르트는 죄를 관성에 빗대어 말한 바 있다. 죄는 큰 어떤 것이라기보다 그냥 관성일 때가 있다. 아무 이유가 없이 그냥 관성이고 그냥 고집인 것이다.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이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알던 것들을 부단히 수정하는 작업은 존재를 깊게 하는 고귀한 행위이다. 고쳐나가는 것은 조속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안다'고 여기는 것을 프로세싱하는 그 자체가 귀한 일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화란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닐 뿐더러 존재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성화는 프로세스이다. 성화는 시간성이며, 사람이 시간성 자체가 되는 일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존재가 무르익지 않는다.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의 시간성이 무르익게 해야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하고, 채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시간은 현존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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