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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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일의 수기, 녹아내리는 고드란트

jo_nghyuk 2020. 9. 17. 22:21

돌파가 안되고 도리어 엎드러질 때에, 스승으로부터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약해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야속하다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왜 약해서는 안되는지, 더 정확히 나까지 약해져서는 안되는지를 깨닫게 된다. 모든 돌파는 직선적 힘을 필요로 한다. 곡선의 유려함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매번 그것이 요청되어지는 순간마다 강이 허리를 구부리듯이 유속을 느리게 하며 퍼지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리듬조차도 자신이 품은 직선적인 등골 덕택에 지속될 수가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운동이라기보단 그저 늙은이의 방랑처럼 맥빠지고, 탕자의 질주처럼 어리석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게 되지 않을까?

앞으로 할 일이 많다, 는 말은 차근차근, 매일의 견실한 기초작업을 지향하는 말이며, 압박에 짓눌리거나 부산한 템포에 시달리는 그림은 그 도면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빚을 나는 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내가 독일에 와서 줄곧 배우고 있는 새와 같은 리듬이다. 다시 큰 책상을 조립해 방에 들여놓고,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책상 위와 가장 가까운 책꽃이의 네뼘 남짓한 공간을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과제들로 정돈해 두었다. 정돈은 공간감을 내포한 지시체이며, 공간감은 최대한의 집중의 밀도를 만들기 위한 특별하게 구성된 지평이다. 공간과 미니멀과 정돈은 정확한 타격지점으로 가기 위한 직선적인 수행과도 같다. 

일 고드란트를 땅에 묻었던 종은 고트란트에서 싹이 저절로 돋아나길 바랬던 걸까. 그저 구리가 퇴색하고 산화하는 것이 현실성이지만 그는 몽상가처럼 구리로 된 동전을 땅에 묻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논문을 한 꼭지씩 쓰면서 일 고드란트를 받은 종이 가진 두려움이 심정적으로는 동의가 되었다.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개요는 노동에 대한 공포로 가득하다. 인간은 노동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노동을 현실화하고 나면 두려움은 분명 점차 사라질텐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부동의 시점에서는 운동이 만드는 에너지 자체가 공포스럽게 여겨지고, 그렇게 게으름은 공포와 엉켜붙어 있는 것이다. 

순종은 그러한 점에서 나를 밀치고 나아가는 힘이며, 스승으로부터 나오는 엄정한 부름이라는 점에서 직선적이다. 연약함은 곡류의 리듬을 중간중간 만들테지만, Aller Anfang ist schwer라는 점에서 모든 시작은 어렵고, 그래서 시작은 전체의 반이나 되는 크나큰 에너지를 요하는 것이다. 에너지를 쓰는 것, 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치킨스톡이 끓는 물에 녹듯이 내 존재 자체가 녹아내리는 일이며, 그래서 게으른 종은 스스로를 녹이는 일을 거부하고 작은 고드란트를 땅에 묻은 후 기어이 주인을 악당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상도 하지, 그래 두려움은 자기를 부인하는 데에서 회피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를 악당으로 만들고 주어진 것을 땅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땅에 묻는 메타포는 그것을 심는다는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장해서 없어지게 하였다는 의미를 겨누고 있다. 

두려워 하는 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 속에 산다. 그러나 두려움의 매는 것이 자기에게서 벗겨짐을 아는 자는 늘 무언가가 생성되는 살아있는 현재 안에 거한다. 전자는 나의 과거이고, 후자는 우리의 미래이다. 고드란트는 편안한 땅 속이 아니라 고난의 불 속에서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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