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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의 소회, 시간의 유속이 새긴 무늬들

jo_nghyuk 2021. 9. 9. 22:07

나는 교회 앞, 가을 햇살이 힘차게 내리치는 광장을 걷고 있다. 샌들을 신고 걸으면 울퉁불퉁한 돌바닥의 감각이 몸 속까지 침투해서 약간의 이물감 같은 것을 남긴다. 무언가를 사유하면서 광장의 첨탑과 구조의 생김새를 관찰하면 전에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일 때가 있다. 사유가 시선에 힘을 실어줄 때가 있다. 더 정확히는 시선에 생동감을 부여할 때가 있다. 어떤 생각의 단초를 발견하거나 생각들이 고양되기 시작될 때에 기존에 보여지던 것들에서 한층 더 깊어지거나, 한발짝 더 나아간 듯한 시선을 획득할 때가 있다. 그건 아마 릴케가 쓴 말테의 수기에서,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라는 시선의 변천과 궤를 같이 하는지도 모른다.

사유하지 않는 나는 흐물흐물거리는 덩어리처럼 시간 위를 부유할 뿐이다. 거기에는 눈금도 없고, 깊이도 없으며 시간이 어둠을 지나고 빛을 조우하며 스스로의 몸에 새기는 줄무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사유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사유된 시간이다. 사유하지 않는 시간은 떠다니는 비말이다. 몸에서 뱉어낼 줄만 알고, 건축되지는 못하는 분산의 엔트로피.

새해가 되면 그래서 꼭 스케쥴러를 산다. 떠다닌 시간은 스케쥴러 안에 공백이 되고 붙잡은 순간들은 단편적일지라도 시간 안에 새겨진다. 아니, 내가 순간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현상들이 비로소 내 안에 시간을 새기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아파트 안의 소파 위에 그냥 놓여져 보내던 때가 있었다. 무기력과 게으름은 근친관계가 아닌가. 어떤 기사에서 아기가 예민하다고 생각되어진다면 그 아기가 예민한 아기가 아니라 불안한 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아이를 그저 예민하다고 보면 부정성은 다 그 아이의 것이다. 나의 시선은 조금도 깊어지지 않고 둘의 시간은 떠다니고 부유하는 피로한 지속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가진 불안의 요소를 들여다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아이가 필요로 하는, 그 아이에게 >너<가 되어주는 >만남의 시간<을 채워간다면, 그 아이는 릴케처럼 섬세하고 명민하게 자라날 지도 모른다. 

코로나는 이 행성의 시간을 박살내버린 메테오처럼 느껴진다. 우아한 선을 그리며 달리던 시간이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상흔을 부여잡고 우느라 보낸 시간이 너무 길다. 반대로 기획되었었던 시간은 충돌한 차량처럼 찌그러지고, 뭉뚱그려져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다. 내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도, 나는 코로나를 만난 지구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주관적 시간이고 나발이고 객관적 시간이 소실되면 자신의 시간을 새기기 위해 붓을 들고 일어섰던 자아는 휘청거리며 모든 획들의 굴곡이 이그러진 문자를 새길 수 밖에 없다. 그게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가 새긴 파열음의 문자이다. 그런 문자에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는 글을 쓰는 것만이,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사유를 하는 것만이 굶주린 무언가를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사유를 통해 시선이 한층 깊어지듯이 글을 통해 사유는 여러 무의식의 단층을 지나 의식의 건축물을 이루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최대한 단순한 문장으로 쓰는 것이 좋다. 그때의 나는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인간의 말은 그것이 얼마나 복잡스럽고 혼란하며, 그래서 모호한 것인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것에 목소리를 부여해주는 것이 아닐까. 나의 글들은 무의식의 바다에서 내륙으로 기어올라오는 발이 달린 물고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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