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미니멀한 삶의 기쁨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미니멀한 삶의 기쁨

jo_nghyuk 2021. 10. 5. 20:24

삶의 기쁨. 생생한 현재. 

그것을 살고 싶어서 다시 미니멀한 삶을 지향하기로 했다. 일단은 SNS 계정을 다 탈퇴해버렸다. 포도원을 조금씩 망쳐가는, 함께 살던 작은 여우들 중 몇 마리를 쫓아내었다.

다시 아침에 기도를 드린 후에 종이책으로 된 Basis Bibel을 읽는다. 또는 뉴스를 보거나 독일 신문잡지를 읽는다. 어제는 하루키의 소설을 독일어로 읽었다. 불과 2007년, 그러니까 14년 전에는 겨우 영어로 읽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독일어로 읽고 있다. 시간 문제이다. 프랑스어를 시작할 때 아내는 나의 유난스러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나고, 일년이 지난 후에 파리에서 나는 프랑스어를 말하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은 지나가고, 마침내 바뀔 것이다. 

미니멀리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것을 실천하는 이유는 순전히 나의 내적인 질서 때문이다. 단순히 환경을 바꾼다고 내면이 질서를 찾지 않는다. 나의 내면이 질서를 원하기 때문에 환경을 바꾸어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조용하고 차분한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에서 나를 헛돌게 만드는 요소들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이럴 때면 동경이나 교토를 가서 늘 걸었던 주택가를 걷고 싶어진다. 익숙함 속에 차분함이 있다. 그리고 그 익숙한 것이 꽤 오랜 시간동안 관리되어지는 사람의 손길을 입으면 차분함은 이제 성실함의 깊이를 얻는다. 길 모퉁이의 서점이나 마을 어깨에 놓인 산이 그렇고 잘 정돈된 방과 길이 그렇다. 길은 3차원 안에 놓인 2차원이며, 3차원에 방향을 제공하는 곧게 펴진 선이다. 그렇다. 길은 곧 시간이다. 20대에 찾았던 교토와 30대, 그리고 40대에 찾는 교토는 다른 Raumzeit이다. 

그래서 익숙한 것들을 점차 스스로의 시선과 방식으로 반복하다보면, 거기에는 일종의 질서가 생기고, 질서는 혼잡하던 나에게 구별된 생명을 부여해준다. 정련된 카오스는 창조의 생동성이 된다. 나는 부지런한 것을 좋아하지만 차라리 느릴지언정 시간의 큰 폭을 두고 차근차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미리 해두는 것은 다가올 시간에 대한 예우이고 벌어질 사건에 대한 배려이다. 대비가 잘 되어 있을 때 즉흥연주의 스케일도 넓어진다.

나에게는 새벽기도가, 그리고 소설처럼 읽어내려가는 성서가 하루에 질서를 부여하곤 한다. 시간은 좀 더 느려지고, 나는 상대적으로 더 연장된 이 하루 안에서 느리게 걸으며 사색을 시작한다. 성실하게, 동시에 느리게 살 수 있는 삶은 가장 좋은 축복이다. 

가을이 되면 부드러운 옷감이 가슴과 팔을 덮는 느낌이 참 좋다. 붉어지는 색채감도 좋고, 전체적으로 깊어지는 자연의 채도도 좋다. 나에게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는 시간인 동시에, 얼마 남지 않은 중간시간Zwischen처럼 느껴진다. 아직 시간이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