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Glücklich-sein des unglücklichen Bewusstseins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Glücklich-sein des unglücklichen Bewusstseins

jo_nghyuk 2021. 12. 27. 22:01

말테의 수기를 보면 말테 브리게가 파리의 한 도서관에서 시집을 읽는 엄숙한 장면이 나온다. '이 가난한 내가 도서관에 앉아 시인을 가지고 있다' 브리게는 가난하지만 시인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근래 예나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배우는 중이다. 1807년에 헤겔은 예나에서 정신현상학 집필을 마쳤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지금 가난한 나는 그가 강의했던 대학에서 프랑스인에게 그의 철학을 배우고 있다. 헤겔은 파리에서 집권한 나폴레옹을 보며 절대정신의 현현이라 외쳤는데, 그 절대정신은 스스로를 예나까지 외화하여 독일을 지양시켜버렸고, 헤겔의 교수직마저 파기aufheben되고 말았다. 나는 파리에서 진군한 프랑스인 학자에 의해 나의 두뇌와 지식의 자기소외를 한껏 경험하는 중이다. 그의 이름 또한 장jean인데, 헤겔이 내 입장이었다면 그는 파리에서 온 장과 예나에서 있던 장이 사실은 하나라고 강조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존경하던 신학교수님 한 분은 수업 중에 이렇게 독백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는 관념론자인가, 실재론자인가? 파울 틸리히는 실존주의자인가, 실존주의자가 아닌가? 그리고 헤겔은 미친 사람인가, 제 정신인가?"

이번 수능에는 난데없이 언어영역 문제에 게오르그 빌헬름 헤겔께서 친히 등장하셔서 많은 수험생들을 오답으로 지양시켜 버렸다 들었다. 헤겔이 잘못한 것 같지는 않고, 국어 시험에 헤겔을 등장시켜버린 출제자의 변증법이 잘못한 것 같다. 심지어 문제를 읽어보니, 철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차라리 개념들을 a, b, c, a', b', c' 등으로 환원시켜서 풀어야 했다는 학원 강사의 유튜브를 보면서 이것은 독해 문제인가 아니면 분석 철학 두뇌 프로그램인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독일에서 공부하는 기쁨 중 하나는 모든 것을 명석판명해질 때까지 배우고, 개념이 밝히 드러나고 나면 이번에는 도리어 그 개념의 심연을 드러다보게 되는 사유의 깊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헤겔의 개념 중 불행한 자기 의식unglückliches Selbstbewußtsein이라는 개념이 있다. 스토아적 엄격성에 자폐된 자아의 확실성이 발전하면, 그 다음은 회의주의자의 단계를 거치는데, 사실 이 회의주의자라는 것이 모든 근거Boden에 대한 부정인지라,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난 다음에 자기 스스로도 확실한 정These의 위치에 설 수 없는 불안정한 상태가 불행한 자기 의식의 상태이다. 자기-의식이라는 말은 더이상 의식이 외부의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의식하는 자기를 의식하게 됨을 의미하는데 이때 자기 자신에게서도 외부에서도 확신을 찾을 수 없는 자기의식은 그야말로 요동치는 파도와 같이 스스로를 계속 덮치며 완성에 다다를 수 없는 반Antithese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바로 그 불행한 자기 의식으로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난한 내가 이 도서관에서 홀로 시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브리게처럼 '가난한 내가 예나에서 헤겔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가난한 이유는 내 자신에게 그 확정성이 없고 여전히 명석판명함에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은 열정을 위한 발화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의 불행한 자기의식은 행복한-불행한 자기의식이다. 라틴어로 stud-ire는 애쓰고 분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애쓰고 분투함이 없으면 더이상 그것은 연구도 공부도 될 수가 없다. 그래서 가난한 나는 예나에서 헤겔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불행한 자기의식은 기쁨을 누리는 중이다. 조만간 헤겔의 얼굴을 스케치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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