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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투하는 우분투

jo_nghyuk 2021. 12. 27. 22:42

내가 현상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캠퍼스 워십 예배의 깊은 임재 가운데서였다. 그때 나는 성령의 인도가 나의 지향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은 나타나는 대상성Gegenseitlichkeit이다. 무슨 말이냐면, 나의 대화의 상대자가 되고 나Ich라고 하는 인격의 친구로서 너Du가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때부터였는지 나는 스스로에게 유폐되어 있는 생활을 그치고 나의 외부로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관점에서는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 어째서였는지 그때부터 나는 개념 하나 모르는 현상-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상학의 현상은 단순히 나와 관련없이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나와의 관련 속에 일어나는 사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의 신 현상학회Gesellschaft der neuen Phänomenologie는 사태Sache가 아니라 사태관련Sachverhalt을 우리가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태이든지 그 사태에 대한 맥락이 있다. 모든 사태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상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바라보는 나 또한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사태의 관련자로서 그 사건의 중력장에 이미 이끌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타남Erscheinung이라 하는 일반의 모든 것들은 나의 의식과 늘 관련을 가지고 있는 현상이라 봐야 할 것이다. 나의 선이해, 나의 역사성, 나의 편견, 나의 지식, 나의 감각, 나의 정감, 컨디션 등등... 그러므로 모든 일어난 현상과 사건은 해석되어져야 하는 요청 앞에 서 있다. 

불가사의한 성령의 경험을 하고 난 후에, 나는 도대체 나의 의식이 일련의 방향성을 왜 가지게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앞에서 성령을 대상성으로 표현했지만, 그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차라리 내 앞에 나타난 새로운 현실성Wirklichkeit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듯 하다. 왜냐하면 내가 획득한 방향의 화살표는 성령 그 자신을 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은 마치 새로운 중력장Gravitationsfeld과도 같았고 힘의 장Kraftfeld과도 같았다. 어떤 주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운동의 방향을 따르라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따르라는 것이었지 예수 자체를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투명한 인격과도 같았으며 늘 하나님의 뜻을 향해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것도, 성령을 따르는 것도 어떤 실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현실성, 생동하는 생명의 능력 그 자체를 경험하며 앞으로 (또는 어딘가로 방향이 정위되어져서) 나아가는 것이리라. 

이러한 성령의 불가사의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나에 대해 너Du로서 다가오시는 대상성이 되어주신다. 사실은 그것이 내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의 나타남의 근원이다. 이 나타남은 내 눈 앞의 나타남이며, 내 신체가 속한 공간에서의 신체성으로서의 나타남이며,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사고하는 생활세계 속에서의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타남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육화,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내가 활동하는 세계 가운데에 나와 같은 모습으로, 나처럼 가난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함께 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며, 나와의 공동존재Mitsein이다. 그는 나와 같은 모습으로 여기에-함께-있다.Mit-da-sein.

어젯밤에는 자기 전에 그동안 쓴 100여 페이지 가량의 박사논문을 훑어보았다. 현상학을 지나 신학까지, 아우구스티누스, 후설과 하이데거를 지나 바르트까지 잘 당도한 듯 보였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후설에 관한 부분들이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다. 더 개진하고 싶은 부분들이 (더 고생하고 땀을 흘리며 즐거워할 부분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서두르지 말고 다만 늘 논문을 붙들고 있으라고 조언해주셨다. 그러면서 앞으로 할 것이 너무도 많다고 첨언하셨다. 위로와 조언과 채찍질의 삼위일체. 앞으로는 프랑스인 장과 함께 리쾨르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될 것인데, 사실 이 리쾨르는 내 논문에 늘 숨어서 나를 도와주던 파라클레이토스였다. 주인공은 언제나 나중에 등장하고, 또 가장 강력하다. 반대로 말하면, 주인공은 가장 강력해지기 위해 매번 시련과 부서져 깨어짐을 경험해야 한다. 나는 리쾨르의 상처입은 코기토das verletzte Cogito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존재하는 중이다)와 데스몬드 투투의 우분투Ubuntu (나는 네가 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다) 사이에 서 있다. 말하자면, 나는 그리스도가 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었고, 내가 생각했던 나와는 다르게 존재하는 중이다. 불행한 자기의식으로서, 나는 언제나 분투해야 하는 우분투이다. 

오늘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서거하였다. 나는 책장에 꽂혀 있던 그의 책 No future without forgiveness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분투하는 우분투만이 미래를 열 수 있을 것이다. 

27.12.2021 R.I.P. Desmond Tu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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