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2월 4일 새벽기도회, 누가복음 23:1-25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2월 4일 새벽기도회, 누가복음 23:1-25

jo_nghyuk 2022. 2. 7. 05:05
2월 4일 금 새벽기도회
찬송 357 통 397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말씀 누가복음 23:1-25
  • 어둠에게 지지 말고 싸우라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으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은 잡혀가셔서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의 공회에 서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구절의 바로 전 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발의 내용은 말하자면 온 백성을 미혹하고 왕이라고 하며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고, 백성을 미혹한 것이 아니라 미혹된 백성을 주께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일부러 예수의 말을 곡해하여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빌라도의 관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다고 대답하신 후에 빌라도의 반응은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견해였습니다. 유대인들과의 고발과 달리 예수께서는 결백하였고 잡힐 이유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들 빌라도와는 큰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로마를 전복시키고 정치적인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리는 5절에서 주장하듯이,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여기 예루살렘까지 온 백성을 소동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은 현상유지를 시키지 않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흔들어 깨우고 그 사람에게 활력을 넣습니다. 누가는 무리와 백성이라는 단어를 구별해서 씁니다. 백성은 예수님의 현장에서 복음의 생기와 활력을 보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무리는 그 복음의 현실에 들어가지 않고 그 복음의 바깥에서 믿지 않음으로 그 생동감의 현장을 방관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생동감은 소요와도 같고 소동과도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들어가지 않을 때 우리에게 복음이 주는 생생함, 생명력은 우리를 거슬리게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돌로 묘사가 됩니다. 그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이 든든히 서는 기둥돌이 되고 내가 그 위에 서는 반석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 돌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과 같이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회개시키러 오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더 심하게 걸려 넘어집니다. 그것이 로마인인 빌라도의 반응과 매우 대조되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복음이 나에게 돌진하면 나는 그것에 걸려 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복음은 살아 있고 생기가 있기 때문에 내 안의 죽음의 세력과 어둠과 부딪혀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총독임에도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빌라도의 무력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관대로 예수님을 풀어주지 못합니다. 무죄선언을 할 뿐 무리의 요구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임을 듣고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이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예수님을 보냅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9절을 보니 헤롯의 질문들에 하나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성서주석가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이 예수께서 헤롯을 아예 상대해주지 않으셨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헤롯은 신기한 이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기적을 보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므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고 헤롯을 상대하지도 않으십니다. 
기적이 믿음을 만들지 않고, 믿음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분별합니다.
그래서 같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의 맥락 안에서 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봅니다. 
헤롯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군인들과 함께 에수를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12절은 하나님의 주권을 보지 못하는 헤롯과 빌라도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들이 친구가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그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어둠과 친구가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결백을 알고 그를 놓아주려고 애를 씁니다. 성경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를 세번이나 놓아주려 애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무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무리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빌라도의 모습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매여있는 죄인의 자화상입니다. 분명히 생각하는 올바른 길이 있는데도 그 길을 걷지 못합니다. 빌라도는 의로운 길보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더욱 조명합니다. 18절과 19절을 보면 살인으로 감옥에 갇힌 자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끔찍한 죄된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인 바라바를 풀어주고, 사람을 살린 예수를 잡아 죽이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예수 앞의 인간이 얼마나 심각하고 끔찍한 죄인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빌라도가 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결정권자로서 그 결정권을 쓰지 않음으로 인해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끔찍한 죄를 방치하였습니다.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조차도 하나의 결정이고 행동입니다.
죄 앞에서 죄에 가담하지 않는다 하면서 그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죄를 방조한 것입니다. 그것이 빌라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입니다. 빌라도는 중립적인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리의 요구에, 어두운 죄의 요구에 매여 있는 자입니다. 그는 빛을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유명한 질문이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이신 예수님을 받지 않고 미워하는 무리나, 조롱하는 헤롯이나, 그 앞에 중립적인 자세를 띄는 빌라도나 사실은 모두 어둠에 가담한 자들입니다. 빌라도와 헤롯이 이날 친구가 되었다는 누가의 말은 그래서 큰 시사점을 띄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과 싸우지 않으면서 어둠을 멀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빛이 우리를 덮쳐오고, 산 돌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깨뜨리고 새롭게 하려 하실 때에, 그 예수를 우리는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둠과 싸우지 않을 것이고, 어둠에 참여하지 않는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어둠의 일을 방조하는 빌라도와 같은 죄를 짓는 모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어둠은 여전히 우리가 사는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을 붙들고 죄와 싸우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할 때에 어둠은 물러가고 주의 빛이 우리가 사는 현장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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