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창 3:1-9: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창 3:1-9: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jo_nghyuk 2022. 2. 21. 19:39

창세기 3:1-9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만큼 탐스럽기도 나무인지라 여자가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바람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 

창세기 2:7 보면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을 지으시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불리웁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잘 다스리라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이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우리가 바이러스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는 만물을 통제하는 존재가 아님을 철저히 체감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어느정도" 무력하고 "어느정도"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철저히 무력합니다. 

우리는 영의 숨결로 지으심을 받은 영장이지만, 동시에 이 땅의 흙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와 흙은 하나입니다. 우리와 이 세계는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흙이라는 것을 잊습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존재임에도, 천사처럼 더 높은 곳에, 더 훌륭한 곳에 올라가고 싶어합니다. 비움이 없는 채움이 우리 사회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느림이 아니라 빠름이 우리의 성취도를 촉구합니다. 가속화된 사회 가운데 우리는 번아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더 효율을 내야 하고, 더 인정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효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 효용이 우리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동산에는  온갖 좋은 것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지으실 때에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고,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가득 적시고 풍성한 강의 줄기가 되어 온 지면을 적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강이 뻗어나오는 원천이 되는 에덴의 한 가운데에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려고"입니다. 뱀이 접근했을 때, 뱀의 질문은 하나님이 무엇을 주셨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지 않으셨으며, 너에게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아담과 하와에게 맡기셨습니다. 청지기인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열매를 주셨습니다. 하나의 나무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입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잘 관리하고 경작하며 너의 삶을 위한 삶이 아니라 에덴의 모든 생명들을 돌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집중하게 합니다. 감사가 아니라, 부정성에 집중하게 합니다. 

3

우리의 뇌는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도파민을 분비하지 않습니다. 소유하지 않은 것이 그래서 더 달콤하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나에게 주신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 분께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족하며 살 수 있는 것은 그래서 영적인 삶입니다. 자족함은 없는 측면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자족함은 내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주신 것을 잘 누릴 수 있는 삶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이 자족하는 삶의 영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에덴동산을 내 마음대로 쓰라고 주신 것으로 여기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게 되고, 그것을 가지려는 욕망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때 뱀의 얼굴 앞에 서 있습니다. 무엇으로 나를 더 즐겁게 할까, 이 에덴동산에서 더 행복해지는 길은 무엇일까? 더 오래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로서 세우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동산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으신 분이며, 너는 땅의 존재임을 잊지 말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과도 같은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이 나무는 아담에게 맡기시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악과는 에덴동산과 바깥의 경계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템포를 놓치고, 자신의 욕심으로 가속화된 세상을 향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는 길을 택했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에덴동산의 경계를 넘어가버렸습니다. 

4

그들은 정말 하나님처럼 되었습니다. 선악을 분별할 있게 되었고, 발가벗은 것에 대한 가치판단이 생겨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을 가립니다. 그들은 선악을 분별하는 인식에 있어서는 하나님처럼 되었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선악에 대한 인식은 생겼으나 행위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을 예수께서 모질게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선을 알고 있음에도 그 선을 행하지 않는 위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선악과를 먹은 모든 인간은 거짓의 노예이며 위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한지를 알고 있으나, 그것을 행하지 않고, 행할 능력도 없으며, 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선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상, 선을 행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것은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은 오히려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해지는" 길입니다. 선악을 종합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악에 대해 미련한 지혜이며, 비둘기처럼 순결한 지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이야기를 듣고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는 길이 아니라, 뱀이 말하는 바에 대해 미련해져야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 속에 들어오는 모든 생각들을 허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계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주신 경계는 선한 것입니다. 경계와 한계는 피조물의 특성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파도도, 육지도, 솔로몬도, 루터도,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경계를 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경계를 넘는 것은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더 뛰어나게 되려고 하는 욕망을 부추긴 것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장하게 하시면 그 성장에는 기쁨과 평안과 깊은 안식의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정신에 의해 부추김을 받은 노력에는 슬픔이 있고 염려와 좌절이 있으며 잠을 이루지 못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탁월해지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주가 주신 한계 안에 머무르는 영성을 훈련해야 합니다. 

5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도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즐거워하지 않고 사람의 형체, 종의 형체를 입고 내려오십니다. 우리는 올라가려고만 하는데,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가십니다. 우리는 영광으로 채워려 하는데 예수님은 그 영광을 비우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주인 노릇을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참 사람을 아담이라 하지 않고 예수님이라 합니다. 참 사람된 모습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가 멈추라 하시면 멈추는 삶, 경계 안에 머무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때가 오지 않으면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여 에덴동산 경계 너머로 넘어간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그의 행위를 먼저 심판하기 이전에, 그의 존재를 찾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왜 네가 있었던 곳에서, 있어야 하는 곳에서 내가 너를 찾을 수 없느냐. 왜 나는 사람을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기괴한 누군가를 마주하고 있느냐. 지쳐 무너지면서도 그것을 부여잡고 놓지 못하고, 안식의 근원으로 돌아오지 않고, 스스로를 가리우고 숨어있는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 죄악으로 망쳐진 에덴 동산, 우리 불순종과 죄악으로 물든 갈보리 언덕 한 가운데에, 주의 생명 나무가, 예수의 십자가가 높이 서 있습니다. 에덴의 회복을 꿈꾸는 사람은 경작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에덴의 소생시키시는 샘물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때, 샘물의 근원이 되신 주님께서, 이 동산을 다시 생명의 강으로 적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다시 주께 돌아갑시다. 주가 정해놓으신 내 삶의 지경 안으로 들어갑시다. 지경을 넘으려고 하는 노력을 그치고, 주가 지경을 넓히지 않으시면 그 안에 머무릅시다. 에덴동산은 주가 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나에게 주신 가정, 나에게 주신 환경,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준비하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나의 에덴 동산에 회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Übermensch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wirklicher Mensch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주의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예레미야 애가 3: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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