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2월 24일 저녁기도회, 누가복음 23:26-38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2월 24일 저녁기도회, 누가복음 23:26-38

jo_nghyuk 2022. 3. 2. 15:28
2월 24일 목 저녁기도회
찬송 461 통 519
  •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누가복음 23:26-38
  • 억지로 지운 십자가
 
 
오늘 성경에는 특별한 인물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구레네라고 하는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갑자기 뜬금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발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발적으로 져야 한다 이런 도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자발적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쩔 수 없이 져야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자발적으로 지려고 하면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여 우리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나에게서 멀리 있고 내가 가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우리의 등에 지워지는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군병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의 등에 강제적으로 지게 하였습니다. 
 
이전에 신학교에 있을 때에 제가 참 존경하는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수업에 들어가면 성령님의 평안이 강의실을 늘 채우는 것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 분께서는 십자가를 “자발적 강제”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자발적이라는 말과 강제라는 말은 상호 충돌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표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발적인 것과 강제적인 것은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구레네 사람 시몬을 안됐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가 참으로 영광되고 복된 일을 하였다고 여깁니다. 십자가를 더이상 지고 갈 체력이 안되는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이 행위는 그야말로 참으로 고귀하고 거룩한 행위이며, 성경에 그의 이름이 기록될 정도로 존귀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장 십자가를 억지로 진 구레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장 그 십자가를 지고 있을 때에는 예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수치와 고난의 무게가 느껴질 뿐입니다. 십자가는 기쁨으로 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가리 라는 찬양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바로 자발적인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의 길을 걷다보면, 좌우가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언덕길로 되어 있어서 산을 오르는 동안은 결코 주위의 경치를 즐길 수가 없습니다. 그 좁고 험한, 꼬불꼬불한 뱀 길을 다 오르고 나서야, 강과 다리와 건너편 산 위의 성과 성령교회와 주변의 붉은 지붕들을 한 건물들의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조망권은, 길을 걸어올라갈 때는 얻을 수가 없고, 길을 마치고 나서야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은 당장에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구레네 시몬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또, 죽으러 가는 예수님을 보아야 하는 여인들도 그랬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보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말은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십니다. 이들은 곧 닥칠 환난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한 환난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우리를 위하심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길을 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진정 사람들이 애통해야 할 것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곧 멸망하게 되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이스라엘을 걱정하십니다. 그래서 34절에서 이렇게 중보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시면서 중보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옹호하십니다. 죄가 없다고 옹호하지 않고, 그들의 무지함으로 하나님께 변론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라고 이사야서는 고백합니다.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심으로 내 죄의 심판을 감당하시며 나를 위해 변론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뀌기를 예수님은 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억지로 메우시는 십자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죄는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시면서 고발하셨다면, 우리는 예루살렘과 같이 멸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면서 나를 위해 변론하고 중보하십니다. “이 사람이 몰라서 그랬습니다. 내가 값을 치르겠습니다. 이 사람을 살려 주십시오.”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며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당신이 보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지는 십자가는 나의 죄의 보응이며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의로우신 분이시고, 의로우신 분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부당한 죽음을 겪으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저는 구원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나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를 위해 변론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에 박힌 두 사람 중 하나는 회개를 하지 않았고, 하나는 회개를 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사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진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드리는 것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그 십자가는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보이듯, 죄인인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죄인의 십자가를 예수께서 져주신 것이지, 내가 십자가와 상관없다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마땅한 보응입니다. 
나의 죄의 자리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의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나는 관망하면 되는 것입니까?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예수님이 나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지는 십자가는 죄값을 치루어야 하는 나의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위해 대신 짊어지신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이제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가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셨고, 이제 내가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의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수준에서, 이 사랑은 자발적 강제입니다. 십자가는 자발적으로 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는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변경하시지 않습니다. 이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내가 그 십자가를 지기까지 기다리십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십자가는 나의 자유로 선택해서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성령께서 나에게 지워주셔야 내가 질 수 있습니다. 강권하시고, 강제로 나에게 씌우시기 전까지 나는 십자가를 질 의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강권하심, 이 강제하심이 은혜가 됩니다. 베드로를 끝까지 예수님이 붙드시고, 혼내시고, 깨닫게 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우심으로 베드로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강권하는 설교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을 싫어하는 우리는 영의 속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하여 그것을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십자가는 영에 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지는 것입니다. 나의 수고가 들어가고, 나의 힘듦이 들어가며, 나의 아픔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육체가 쇠하여갈 때에, 마음이 상하여 가고, 정서가 쇠잔하여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천로역정의 좁은 담벼락 산길을 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픔이 없이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만나서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서 품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금도 나를 위해 하시는 작업이 그것입니다. 만나면 아파서 싫어서 움츠러드시는 것이 아니라, 이 고슴도치, 죄악으로 가득한 나를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안고 놓아주지 않으십니다. 나를 사랑하심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심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죄인 사랑하심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연약하고 완고한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처럼 중보하고 용납하는 십자가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구레네 시몬의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처럼, 지금은 알 수 없으나 후에 크나큰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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