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3월 14일 새벽기도회, 창 3:9-21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3월 14일 새벽기도회, 창 3:9-21

jo_nghyuk 2022. 3. 14. 16:51
3월 14일 월 새벽기도회
찬송 211장 (통 346)
  •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말씀 창세기 3:9-21
  • 또 다른 나무 열매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남편으로서, 에덴동산을 지키는 자로서 세워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유혹에 넘어가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하와의 말을 들었고, 하와는 하나님과 아담의 말이 아니라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후에 자신이 벗었음을 알고 두려워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무언가 자신을 가리울 것이 필요하단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가려야 하는데 가려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숨어 있습니다.
 
아담은 원래 벗은 채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리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덮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에 죄가 크게 보입니다. 자신의 죄를 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 물으십니다. 내 말을 왜 지키지 않았느냐 물으십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저 여자 때문에"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물으시는데, 아담은 자신이 먹은 것의 이유가 하와 때문이고, 하나님 때문이라고 죄를 전가합니다. 
 
로마서 2장을 보면, 갈라진 로마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바울이 다음과 같이 책망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아담은 같은 죄를 행하였음에도 하와를 정죄합니다. 하와도 자신의 죄를 인정치 않고 뱀을 정죄합니다. 누구도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수렁 속에 빠져 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 죄는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깨뜨릴 뿐 아니라 이웃과의 하나됨을 깨뜨립니다. 또, 자연세상과의 하나됨도 깨뜨립니다. 뱀은 애초에 마귀가 아니라 동물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다른 동물보다 더 저주를 받으리라”는 말은 뱀이 천상적인 마귀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는 모두 에덴동산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에 다 함께 살고 있었는데, 뱀에게서 하와에게, 하와에게서 아담에게 다른 말이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고 죄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14절을 보면 뱀이 저주를 받고 18절에서는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명하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적으로 저주하신다고 하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 구절을 보고, 다행이구나, 인간은 저주를 받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선악과를 먹은 죄의 결과로 나오는 분열의 생각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의 인간은 하나됨을 기뻐하지만, 선악과를 먹은 후의 인간은 자기 혼자 잘됨을 기뻐합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 얼마나 아프든 자기 혼자 잘 되면 상관 없는 것, 그것이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담과 땅은 서로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흙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은 아담이 사는 터전 외의 모든 땅이 저주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나의 생활 터전이 저주받았다는 것은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나 또한 저주의 결과를 경험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저주받은 비극적인 절망에서 끝맺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절망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20절에서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 즉 생명이라고 짓습니다. 하와는 모든 생명이 있는 자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받은 죽음의 저주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축복은 멸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21절의 이야기는 그래서 가죽옷의 재료가 된 희생양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수치, 그 죄악을 가리워주기 위해 하나님은 다른 생명을 희생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생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 자신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대신 그 죄값을 치루십니다. 우리가 서로를 원망하고 정죄할 때에 하나님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정죄의 희생양이 직접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 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열매,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은 우리가 용서를 받고 다시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됨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를 먹는 상징은 심판과 정죄의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상징은 용서와 화해의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과 악에 눈이 밝아지는 선악과와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는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우리를 미련하게 합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자리에 내가 서는 것이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데에 미련하여지고, 선한 데에 지혜로워짐으로, 용서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또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용서함 받음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도 용서하는 것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저 사람 때문이다. 저 사람이 죽어야 하고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생명나무 열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은 "다 나 때문이다. 저 사람이 몰라서 그랬다"라고 말합니다. 가죽옷과 같이 허물을 덮어주는 희생의 사랑이 있습니다.
잠언 11:13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이들의 허물을 누설하는 자입니까,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주고 덮어주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가죽옷,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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