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3월 23일 새벽기도회, 로마서 2:1-11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3월 23일 새벽기도회, 로마서 2:1-11

jo_nghyuk 2022. 3. 23. 16:59
3월 23일 수 새벽기도회 
찬송 360 통 402
  • 행군 나팔 소리에
말씀 로마서 2:1-11
  • 참고 선을 행하라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로마 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헬라인 그리스도인들의 갈등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여전히 율법적 사고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들의 마음에 여간 들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여전히 연약함이 많았고,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율법을 꾸준히 지켜오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매우 거슬리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은 사람의 생각 내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내가 누군가를 판단한다면 나의 말짓과 몸짓 그리고 표정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상대에게 전달이 됩니다.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들이 판단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고치면 되잖아!' 그리고 헬라인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해도 안되는데 어떡해!' 
 
바울은 1절에서 그런 사고가 강한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판단하는 그 판단,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판단이 바로 너 자신을 판단한다. 왜냐하면 네가 같은 일을 행하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누군가의 약점이나 허물이 굉장히 거슬릴 때에는 나 또한 그러한 문제를 안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투영되어서 그 사람을 강하게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사실은 내가 거기서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유하게 풀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으로 내가 그 문제에서 해방되었다면, 더는 그 문제가 나를 사로잡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이들의 연약함에 대해 더이상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신 덕분에 우리가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그래도 바른 길을 계속 깨닫게 됨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바울도 4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와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의는 다른 사람의 연약을 용납하지 못하고, 오래 참아주지 않습니다. 쉽게 화를 내고, 정죄하며, 멸시합니다. 바울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연약을 정죄하고 판단할 때에, 네 자신의 연약을 용서하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책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기다리시고 인내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아주 잘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고집하는 기회로 삼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한다"는 바울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번째는 너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네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이웃을 판단함에도 너 스스로 그 죄를 또 짓는다는 점에서 너는 더 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하는 큰 책망의 요인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판단하였던 네가 같은 죄를 범한다면, 네가 받아야 하는 책망과 비판은 더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6절을 보면 각 사람의 행위대로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역할은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의 썩을 것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썩지 않는 삶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하든, 그것에 시선을 돌리거나 판단할 필요도 없고,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맞춰가도록 끊임없이 훈련시켜야 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이 말 자체에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삶을 깎아나가는 훈련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유대인들은 다른 이를 비판할 시간에, 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나를 훈련해나갔어야 했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심판도 먼저 임하고, 상도 먼저 임한다고 오늘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선택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유대인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보시며, 하나님은 교회에서 어떤 책임을 추궁하실까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독일 땅과 교회를 보시며,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책임을 추궁하실까요?
요즘 부르는 찬양가사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연약함에 끊임없이 공감하실까요? (우리는 이 찬양을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림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명 앞에 서게 합니다. 
11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행위와 관계없이 우리를 간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를 가장 먼저 책망하십니다. 
잘못하면 남들보다 더 많이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진실되게 찾으면, 누구보다 먼저 나에게 상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오늘 우리의 삶에 참고 선을 행하는, 끊임없이 참으며, 끊임없이 선을 행하는 이 거룩한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강과 존귀는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싸움을 싸운 자가 취하는 면류관과도 같은 것입니다. 
오늘도 참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썩을 세상의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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