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3월 25일 새벽기도회, 로마서 3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3월 25일 새벽기도회, 로마서 3장

jo_nghyuk 2022. 3. 25. 14:36
3월 25일 금 새벽기도회
찬송 347 통 382
  • 허락하신 새 땅에
말씀 로마서 3장
  • 사람의 불가능성, 하나님의 가능성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율법은 하나님의 생명의 물이 다니는 수로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수로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강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없는 율법은 문자 그대로는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할 뿐더러 사람을 정죄할 뿐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따라갔지만 그 율법이 사람을 살리는 의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으로 기능하였습니다. 정죄와 판단은 미래를 열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과거의 실패와 과실에 가두어둡니다. 
하나님은 율법이라고 하는 수로를 통해서만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의 양심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물의 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을 따르지도 양심을 따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바울이 9절에서 말하듯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의 문제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뿌리부터 죄인된 존재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자꾸 율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의를 만들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무엇을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까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뿌리부터 죄인이라는 사실, 내가 하나님의 뜻에는 실상 관심이 하나도 없는 죄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루터가 말하듯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파산한 사람들이고, 하나같이 가련한 거지들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고백은 모두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고백이었습니다. 
제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 인간이 지은 건물인데 한이 없이 높은 건물을 보았습니다. 그 위용에 압도당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교회 건물이 있었는데 아주 검소한 모양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압도적인 위용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은 진실됨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자꾸 압도적인 것을 찾습니다. 탁월한 것을 찾습니다. 뛰어나고 놀라운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리가 있지 않기 때문에, 자꾸 자신의 탑을 높게 쌓아올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낮아지며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이 낮아지셨다면,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형상은 낮은 형상이요, 겸손한 형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하여야 생명의 길을 얻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해야 생명 길을 찾습니다. 
 
솔로몬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라고 경고합니다. 나 자신의 의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하면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람을 배제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배제의 결과는 다시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의 목을 조르게 됩니다. 반대로 자신의 허물로 이웃이 고통을 받는데도 계속 그것을 고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이웃을 괴롭게 하며, 또 나에게 돌아와 나를 인간답지 못한 삶으로 파멸시킬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래서 자신의 의 때문에 패망의 길로 가지도 말고,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음을 앞당기지도 말라고 조언합니다. 양 극단을 피하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에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또 우리의 불의를 극복하여 우리를 의로 이끌어줍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우리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의 불의를 극복할 수 있는 과정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이 길 위에서 여전히 죄인이지만,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짐을 입고 의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가 이끄는 길로, 하나님의 생명의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따라갈 때에 미래가 생기고, 의가 회복되며, 생명의 원천에 맞닿은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 삶은 나 자신에게 엄격하고 이웃에게 관대한 원칙적인 삶 이상의 삶입니다. 이 삶은 나도 살고 이웃도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꾸짖는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하나님이 덮어주신 허물에 대해서 자유해집니다. 때로는 나에게도 관대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웃에게도 충언을 해야 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할 때 그것이 참으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용서하시는 의입니다. 화해하시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26절에서 말하듯 자기도 의로우며 예수 믿는 자도 의롭게 하시는 의를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래서 은혜입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듯 인간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롭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같이 모두 위선자이며 의에 파산선고를 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지도 않고, 신실하지도 않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의와 신실하심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의는 인간을 용서하시고,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복음의 정수는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입니다. 우리가 망쳐놓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믿지 않던 이방인을 돌아오게 하시고, 신실하지 않던 유대인을 다시 신실한 자리에 세우십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의 위력이며,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생명수가 다니는 길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법을 다시 익혀야 합니다. 내가 만든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주께서 지어가시는 진실된 건축 위에 나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은 언제나 가볍고 기쁩니다. 내 힘이 아니라 주가 주시는 힘으로 가기 때문이며, 주님의 물결 위를 유영하기 때문입니다. 주가 세우신 질서의 결을 따르는 것은 전혀 무겁지 않고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우리에게 불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에게 가능합니다. 내 힘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 길은 역설적으로 참 쉽습니다. 주님을 따라갑시다. 순종을 배웁시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율법을, 하나님의 원뜻을 성취해가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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