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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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꿈 속에서 신발을 찾아다녔을까

jo_nghyuk 2022. 4. 28. 00:37

허리가 아파서 후설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근력 운동도, 스트레칭도 쉼과 같이 가지 않으니 자기 혹사가 되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예나에 가는 대신 바이마르의 도서관이 문 여는 시간에 맞추어 가서 개인 방을 얻어 학회에 발표할 내용을 연구하기 위해 리쾨르를 읽었다. 한국어로, 독일어로 그리고 프랑스어로. 사실 학회 참여가 결정되고 나서도 발표 준비를 구체적으로 하지 못했었다. 이번 학기에 예나에서 수업을 꽤 많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일년 정도 남은 유학생활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서 여러 수업을 듣고 있었다. 실제로 후설 수업은 나에게 너무도 큰 지적 훈련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계 상황 가운데에 있다. 허리 통증은 가시지 않고, 읽을거리를 다 준비하고도 차마 기차를 탈 수가 없었다.

나는 꿈 속에서 신발을 잃어버렸다. 신발을 잃어버린 나는 신발장에서가 아니라 내 발에서 신발을 발견했다. 나는 신발을 신고 있으면서 신발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다른 신발을 찾을 필요가 없는데도 내가 신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내가 무엇을 신고 있는지를 몰라 신발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든 시간에는 때가 있다. 모든 시간이 나의 때는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때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 나는 스케쥴러의 오늘 칸에 Tschüss, Edmund. Bonjour, Paul.이라고 적어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리쾨르를 원어로 읽으며 생각이라는 것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수동성과 이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기쁨과 긍정성이 가진 팽창의 운동은 좋은 것이다. 더 큰 시야를 획득하기 위해 나는 팽창해야 한다. 그러나 그 팽창의 능동성에는 늘 수축의 수동성이 뒤따른다. 참된 종합은 긍정성의 팽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차분함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성에서도 올바른 방향의 종합을 발견할 수가 있다. 

긍정성으로 가득한 삶에는 반추reflexion의 호흡이 없다.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거나, 적어 내려가기 위해서는 그 일들이 지나간 것이 되어야 한다. 음악의 멜로디가 지나가고 나야 그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음악이 멈추고 나야 그 음악을 감상했다고 할 수 있다. 반성은 종료된 것을 향하는 작용이다. 봄이 오며 이미 예감했지만, 에드문트 후설을 떠나보낼 수 있어야 폴 리쾨르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이 시간 속을 사는 인간의 한계성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며, 인간은 그 때라고 하는 방향지워진 시간의 물결을 따라가며 자기 안에 무늬를 새기는 것이다. 물 속에 있는 물고기에게 물이라고 하는 한계는 좋은 것이다. 물을 벗어나려고만 하면 한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물은 그에게 있어서 삶을 위한 공간Lebensraum인 것이다. 

저번 블록세미나에서 현상학과 심리치료를 접목한 시간론을 공부하면서, 현대인이 겪는 번아웃이 자신의 생물학적 시간리듬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기이력의 시간의 동기화 과정 중에 함몰되는 개인의 고유한 시간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를 접한 적이 있다. 번아웃은 내가 가진 연료가 다 타버리는 것이라고. 다르게 말하면 떠나보낼 것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붙들고 있어서. 다르게 말하면 내 실존이 가진 한계 부정성을 무시하고 계속 달리고 있어서. 다르게 말하면 세계에서 요구하는 것과 내 안의 욕망이 한껏 뒤엉켜 있어서. 

달려가기만 하던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좋은 신발이 아니라 잠시 신발을 벗고 자신의 발을 쳐다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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