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3월 28일 새벽설교, 로마서 4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3월 28일 새벽설교, 로마서 4장

jo_nghyuk 2022. 5. 4. 00:11
3월 28일 월 새벽기도회
찬송
말씀 로마서 4장
 
바울은 의도적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라고 1절에서 설명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는 3장에 이어 4장에서는 율법의 행위를 의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하여, 그래, 우리 육신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해 말해보자. 그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행위의 의로움은 늘 자랑거리를 향합니다. 그리고 그 자랑거리는 인간들 사이에서 평가되어집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람들 앞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의 의로움을 자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다고 바울이 말합니다. 의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운 의의 기준을 채우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가 의와 불의를 결정합니다.
 
의는 우리의 올바름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순종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순종의 행위를 포함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였음을 말합니다. 이 순종은 인간이 만든 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가서 의를 선물로 얻는 것입니다. 순종은 보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만드는 것으로 의를 만들지 않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로 나아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하신 선물을 받는 것이 순종의 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는 로마서 4:3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신뢰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잉태할 능력이 끊어진 사라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것을 믿고 바라보았더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육신의 조상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유대인들에게 상속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입니다. 할례자의 조상이 아니라 무할례자의 조상이며, 율법의 조상이 아니라 자유자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받은 복을 상속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3절에서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이 상속자가 되리라 하신 약속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바울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의지를 동원한 시도를 합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 로마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전혀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가 되지 않으며 의로 계산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아브라함의 의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에 맞는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향을 분별하지 않은채로 몸부림치는 것은 슬프지만 우리를 조금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게 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향이 아닌 그것을 계산해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살며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몸부림칩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의 약속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하나님의 때에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하는 솔로몬의 시간개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 달려갈 때인가, 멈춰설 때인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나의 욕심에 하나님을 맞추거나, 의로워지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기다려야 하는지 움직여야 하는지 하나님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력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오는 영성이며, 인간의 지혜나 선함이 아닙니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멈추어 서야 합니다. 나의 의지, 나의 욕심, 나의 계획에 하나님을 동기화하는 것을 그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간에 나의 의지와 나의 갈망과 계획을 동기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시간은 더 크신 하나님의 시간에 동기화될 때, 영원한 시간이라는 질적 도약을 얻고, 충만해짐을 입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을 닮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를 닮으려 하는 대신에, 고유한 나 자신을 찾아오시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더 탁월해지려 하는 대신에, 나에게 말 걸어오시는 하나님을 따라 진실되게 빚어져가는 것이 본질적인 삶의 태도요, 영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실수한 후에 다시 찾아오셔서, 내 앞에서 온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신실해야지, 꾸지람을 주십니다. 게으르지 말아야지, 책망을 주십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 나를 혼내시는 음성도 선물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상적인 잔잔한 호수처럼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무를 휘감는 불꽃이며 바위를 깨는 폭풍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에 대한 순종도 선물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진실된 교제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율법의 요구에 대한 충족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 걸어오심은 일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우리를 주님과 함께 동행하게 하시는 축복이며 선물입니다. 우리의 순종에는 보수가 필요치 않습니다. 순종 자체가 우리가 받는 선물이며 상급입니다. 내가 동행하는 하나님이 나의 상입니다. 
욕심은 일을 그르칩니다. 그러나 순종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낳습니다. 
우리는 애써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항복해야 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에게 항복하는 삶만이 우리를 의로운 길로, 성령 안의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항복하십시오. 하나님이 마음껏 역사하도록 나를 내어드리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넓게 가지고, 여유를 가지며, 담대하십시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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