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3월 29일 새벽설교, 로마서 5:1-11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3월 29일 새벽설교, 로마서 5:1-11

jo_nghyuk 2022. 5. 4. 00:12
3월 29일 화 새벽기도회
찬송 333장 통 381
  • 충성하라 죽도록
말씀 로마서 5:1-11
  • 화목함을 누리자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여러분은 환난 중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바울은 연단된 인격은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지는 인격이라고 설명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말에서 이 연단은 단련된 인격을 의미합니다. 환난을 인내하는 인격은 단련된 인격입니다. 동시에 이 인격은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격입니다.
여러분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망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많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믿었던 만큼 그 사람이 나를 실망시킬수록 나는 큰 배신감을 느낍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상처 받을 때는 내가 상처받았음을 상대방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아닌가 합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사람은 하기 어려워서 에둘러 넘어갑니다. 사실 거기에 용서하기 어려운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는 일본인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잘못의 인정에 진정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환난 중에 연단된 인격, 소망을 버리지 않는 인격으로 예수님을 제시하려 합니다. 
오늘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6절에서 고백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풀어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아직 우리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았을 때에, 우리의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런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로 확증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역을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이라고 표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용서를 구해서, 내가 회개해서, 내가 죄값을 치루어서 하나님이 나와 화해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고, 내가 원수이고, 내가 경건하지 않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셔서, 내 죄 값을 십자가에서 치루셔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기 위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어떠함 이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과 소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나를 받아주시는 희생의 사랑입니다. 
현대에 들어서 손절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지속적인 상처를 주거나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바뀔 의향이 없을 때에 그 사람을 손절한다고 표현합니다. 더 이상 그 사람과 관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사람에 대한 소망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미래의 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거야. 앞으로 관계할 수록 저 사람은 계속 나를 상처 줄 거야. 그리고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계속 모를거야. 저 사람은 저렇게 생겨 먹었거든. 관계할 가치가 없다. 서로의 길을 가자. 
 
그런데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손절하듯이 우리를 그렇게 냉철하게 대하신다면 우리의 삶에 소망이 생길까요?
'너는 여전히 바뀌지 않는구나. 내가 그동안 너에게 준 사랑과 너를 셀 수 없이 용서해주었는데. 내가 너에게 준 은혜와 축복이 이렇게 많은데 너는 여전히 바뀌지 않네. 너는 구제불능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완고한 마음처럼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의 삶에 소망이 있을까요? 우리의 삶에 미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내가 너 하는 것을 봐서 용서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하겠다' 라고 하신다면 우리의 삶은 엄청나게 무거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하심 덕분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돌이킨다는 말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 돌이킬 수 있습니다. 나를 받아주는 탕자의 아버지가 계셔야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가 먼저 있기에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면 용서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로 끊임없이 선택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때문에 얼마나 아프실까요. 너무 많이 아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 아프기를 선택하십니다. 나를 향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망하는 것에 우리는 수치를 입지 않습니다. 소망하는 것이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덕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을 인내하고 계십니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낳고, 연단된 인격은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소망을 이루어지심을 본다고 합니다. 나는 이웃을 향하여 소망을 포기한 자입니까? 아니면 끊임없이 나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그의 명령처럼 일흔에 일곱 번을 나에게 잘못하여도 그를 용서하며 예수님의 소망이 이웃에게 흘러가게 하는 자입니까? 분명한 것은 내가 이웃에게 소망을 포기하면, 하나님도 나를 향한 소망을 보장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마음으로 네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며, 네가 네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너의 죄와 허물을 용서할 것이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상처를 받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 삶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용서해야 하기 때문에 더 상처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용서하는 사랑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러한 삶이야말로 주를 따르기 때문에 따라오게 되는 환난의 삶, 환난 중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삶이 아닐까요? 바울은 1절에서 화평을 누리자 라고 말하고, 11절에서 그 화목함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화목함, 이 용서함의 기쁨을 누리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원통함과 원망함, 나에게 사과하지 않고, 또는 자기 허물을 모르고 나에게 끊임없이 아픔을 주는 이웃의 허물 때문에 묶여서 쓴 뿌리가 생기고 자유하지 못한 삶에서, 나를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이 화목함의 기쁨을 누리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거저 받았으니 우리도 거저 주어야 합니다. 그 용서는 선물입니다.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선물을 주는 것이며, 그러므로 은혜를 나누고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영적 전쟁, 사랑의 영적 전쟁에 승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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