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5월 1일 주일설교, 시편 1편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5월 1일 주일설교, 시편 1편

jo_nghyuk 2022. 5. 4. 00:13

시편 1편

1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망하리로다

1

오늘 우리가 보게 . 시편 1편은 마치  건축되어진 건축물처럼 상당히 균형 있게 구성되어 있는 시입니다. 1-3절은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4-6절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  가지의 동일한 은유를 가지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 , 자리로 표현되는  은유들은 사람의 생각, 사람의 행동, 사람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1절에 등장하는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꾀라고 번역된 히브러어 단어는 계획 또는 그러한 계획을 꾸미는 모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에서는 concilium으로, 영어에서는 counsel이라고 번역됩니다. 여기 등장하는 악인들의 꾀는 그래서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집합적인 사람들의 모임과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계획이라고 해석할  있습니다.  있는 사람은 단수형으로 등장하는데, 그를 둘러싼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은 모두 그룹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있는 사람  사람을 마치 거대한 세상이 둘러싸고 있는 듯한 형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에   있는 사람이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번째로는 길의 은유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길이라고 하는 은유는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삶의 양식들을 지칭하는 데에 쓰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선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이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의 뜻을 말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방향과 상관없이 행동하는 그러한 행동 양식을 따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죄인들의 길에 선다는 것은 길에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중립적으로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삶의 모습으로 섞여들어가는 것을 그래서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느덧 나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와 별반 다를 바가 없이 생각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 스스로 자랑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험담하는  방식과 똑같이 말을 하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은 하고야 마는 사람들과 다름 없이 나도 그렇게 행동하는  삶의 양상이 바로 죄인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의 길에 선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리의 은유가 있습니다. 시편에서  자리는  있는 자가 앉는 의자를 의미합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것은 단순히 내가 내면적으로만 오만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의자에 앉는다는 것은 권세를 부리는 자가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오만함은 단순한 자세나 생각이 아닙니다. 오만함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힘의 과시로 드러나게 되는 자기 중심적인 힘의 행사를 의미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왕좌라고 표현하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앉게 하시지 않고 내가  자리에 앉아서 내가  삶의 주인이 되고, 뿐만 아니라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고 침범하는 그런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방식을 내가 따라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그러나  있는 사람은 이러한  가지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사람입니다.  시편의 내용은  있는 사람에 관한 것이지 죄인과 악인과 오만한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죄인과 악인과 오만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마치 배경처럼 제시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말하는  있는 사람이 하는 행동은 이러한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힘을 과시할지라도,  있는 사람은  길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있는 사람은 무엇을 따라갑니까?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따라간다고 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생각을 만들고, 내가  길을 만들고, 내가  자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각을 만드시게 하고, 하나님께서  길을 만드시게 하며, 하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도록 내어드리는 사람,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야로 묵상한다고 하는 meditatio에서  meditor라는 라틴어 동사는 수동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능동태의 동사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곱씹는다, 되새긴다는 의미를 가진  묵상이라는 행동은  되새기고 곱씹는다는 행위야말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삶에 말씀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sich von Gott hören lassen,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고 나는 듣는 자로서  앞에 서는 상당히 관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사입니다. 우리는 묵상한다고    스스로의 생각을 곱씹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감정을 되새긴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곱씹고 되새기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입니다.  있는 사람이 단수형인 이유는 우리가  말씀 앞에서 그래요,  말씀은  사람,  사람이 들어야해요, 라고 하나님 앞에 말할  없으며, , 맞습니다. 제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고백하며 철저히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묵상은 내가 생각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내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고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되새겨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어떤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들으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만 가지고 다시 예배당을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내려놓고, 주께서 말씀하시게 한다면, 그래서 나를 듣게 만들고, 주가 말씀하시게 한다면,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것입니다. 

 있는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은 자신의 꾀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에 나도 속하였다는 소속감이 아닙니다. 나도  자리 얻었다 하는 권력의지의 충족도 아닙니다.  있는 사람은 오히려 그러한 방향과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방향의 길로 나아가면서 그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이 따르고 있음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가 즐거워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나 사람의 능력이 아니요, 세상이 어리석다 하는 하나님의 지혜요, 세상이 무력하다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가 즐거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3

저는 청년들과 함께 주말 저녁마다 함께 기도회 시간을 가집니다. 그때마다 청년들의 고백에서 저는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너무도 순전하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자신의 학업 과정 가운데에 열심히 공부를 하다보면 사실 매일 드리는 저녁 예배 시간을 놓칠 때가 많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침 예배  아니라 저녁 예배까지 드리면 세상에서  하냐고 비웃겠지만 자신은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고백이 어리석게 들리십니까? 저는  고백이 전혀 어리석게 들리지 않습니다. 만약  청년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게으름에서  이야기를 했다면 저는  감흥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 나아가, 또는 직장에 나아가 세상에서 요구하는 효율을 내면  수록, 그리고 그것으로 성취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다시 주님 앞에 그때마다 돌아온다는  고백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효율과 성취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내는 효율과 성취, 나의 지혜와 사람의 칭찬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죄일 것입니다.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요, 세상의 능력이요, 세상의 권력이라면, 그래서 그것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그것을  추구하고 따라가게 한다면 그것은 우상일 것입니다. 

 

시편 1편이나 잠언 1장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복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며 시작됩니다.  있는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은 놀랍게도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요 규칙입니다. 나의 뜻대로 행하는 자유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규칙을 따를  있다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마치 아이가 아빠와 엄마의 행동을 따라하며 즐거워하듯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가 즐거워하는 것은 그래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그것이 이따금씩 자신을 책망하는 목소리가 되어 자신을 채찍질해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저의 지도교수님은 어떨 때는 제가 (나름) 열심히   같아도 열심히   것이라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제가 자발적으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제는  너무 무리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제가 교수님 말씀과 반대로 행하면 어떨까요. 

교수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하셔도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거니까 무리를 할게요.  맘대로  해볼게요. 아니면, 교수님 그렇게 말하셔도 저는 열심히  거에요.   압박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며 내가  삶의 규준과 원칙을 세운다면 저의 유학생활의 끝은 어떻게 될까요? 좌충우돌하다가 다다라야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마치지 않을까요?

 

4

그래서 시편은 이제  있는 사람의 길의 끝과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길의 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길의 열매가 어떠한지를 보면 우리는  길이 선한 길인지 악한 길인지를   있습니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

그의 결과는 형통합니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가는 삶은 때를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립니다. 

반대로 4절에서 나오는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뿌리깊은 나무처럼 보이는  있는 사람과 달리 악인들의 삶은 여기저기 부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나의 뜻을 따라 살지만 사람들의 인정과 가치를 따라 흔들리며 끝없이 불안에 시달리는 삶이 됩니다. 

이제 악인의  (모임), 죄인의 , 오만한 자의 자리의 은유가 의인의 모임, 의인의 , 하나님의 보좌와 대비되며 등장합니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 들지 못하리로다

여기 5절에 등장하는 심판이라고 하는 말은 1절에서 오만한 자들의 자리의  자리와 대치되는 절대적인 권세의 자리입니다. 오만한 자가 앉았던 자리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가 등장하고, 악인들,  오만했던 자는 진정 높으신 분의 자리 앞에서 패망하고 맙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교만했던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높으신 보좌 앞에서 패망의 끝을 맺습니다. 

 

같은 5절에서 나오는 의인들의 모임은 우리가 앞서 다룬 악인들의 꾀라고 하는 concilium  계획의 모임에 대비되며 등장합니다. 의인들의 모임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무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간 사람은 하나님의 무리에 들어가지만 자신의 계획과 욕심을 따라간 사람은 다른 무리에 속해 있기에 의인의 모임에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죄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 대치된 상태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길은 하나님 앞에 영원히 남고 다른  길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나의 길을 따라가든지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든지 나는 자유를 행사합니다. 그리고  인생 길을 걸어간 후에, 어떤 길은 하나님 앞에 남고, 어떤 길은 남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고 걸어간 길의 끝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길은 길이 아닙니다. 길이라고 하는 것은 출발지와 목적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시작이 없으면 순종을 명하신 분을  길의 끝에서 만날  없습니다. 

 

시편 초반부에서  있는 사람은 압도적으로 대다수인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의 삶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그러한 삶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처럼, 그러한 삶이 주류이고 자신이 걷는 반대방향의 삶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후반부에 가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날에   있는 사람은 의인들의 모임으로 새롭게 등장합니다. 처음 걸었던  순종의 길은 외로운 길이었지만,  순종의  위에서,  길의 끝에서  외로운 싸움을 했던  사람은 동역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는  위에 있습니다. 교회는 그래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위를 걸어가는 동역자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내가 들어갔다 나가는 건물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는 사람들이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명합니다. 내가 교회라면, 내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면, 나는  성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꾀와 행동과 권세를 추구하고 있다면, 나는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길의 끝에서 나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처럼, 순종의 길은 외로운 길이며, 하나님 앞에  단독자의 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정말 교회되기 위해서는 우리끼리의 계획을 내고, 모임을 내고, 힘을 행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먼저 서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하나님이 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삶의 왕의 자리에 앉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까지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입니다. 

 

 땅이 우리의 본향이라면, 우리는 주류의 삶에 섞여서 살아야  것입니다. 세상의 주류가 말하는 것을 따르고,  무리에 들어가서 섞이고, 그러한 힘을 함께 부리며, 또는   아래서 살아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본향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고, 비주류이고, 외로워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위에 있고, 하나님께서 마치실  위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을 주야로 들리게 하여서, 하나님을 향해 가는   위에서 서로를 만나게 되는 예나 바이마르 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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