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6월 28일 저녁설교, 로마서 7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6월 28일 저녁설교, 로마서 7장

jo_nghyuk 2022. 6. 29. 00:12
2022년 6월 28일 화 저녁기도회
찬송: 268장 (통 202)
  •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말씀 : 로마서 7장
  • 무거운 브레이크를 풀고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죄인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탐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에 들어오는 음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즐거움을 찾는 데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을 용납하라는 주의 명령을 지키고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율법 앞에서 지옥 행이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이런 죄를 행한 우리는 모두 지옥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 말대로 죄에 팔린 자들입니다. 죄에 팔렸다는 것은 내가 죄에 대해 권세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에 동의하고, 죄가 나를 사갔으며, 나를 낚아챘으며, 나를 노예 삼아 마음대로 부리는 주인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를 다스리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죄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죄가 나만 다스리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죄가 나를 다스리면, 그 죄는 나와 가족을 상하게 하고, 이웃을 상하게 하며, 교회를 상하게 하고, 세상을 상하게 합니다. 마귀가 원하는 것은 모두가 망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역사하는 것이 선인지 죄인지 아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나를 통해 이웃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있는가, 아니면 나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아파하고 있는가? 나의 의로움 때문에 다른 이가 아파한다면 그것은 자기 의의 죄입니다. 나의 죄악됨 때문에 다른 이가 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룩에 대해 분투하지 않은 태만함의 죄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기차가 레일 위를 따라가듯이 죄의 길을 멍하니 따라갑니다. 감정이 들어오는 대로 의지가 끌려갑니다. 결국에는 나의 이성도 거기에 맞추어 사고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감정과 의지와 이성을 이웃을 살리고 생명을 주라고, 섬기라고 주셨는데 나는 나의 감정과 의지와 이성을 나를 섬기게 하고, 나의 감정을 맞추게 하고, 내가 더 편해지고 높아지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천국에 사는 시민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탄 기차, 내가 따라가는 레일은 하늘을 향하고 있지 않고 저 땅 밑의 깊은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중력처럼 죄는 우리를 끌어당기고 삼킵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의 의지보다 강하고 우리의 이성보다 강합니다. 죄는 내 감정을 잠식하여 나를 괴물로 만듭니다. 
 
이 죄를 어떻게 이겨야 할까요? 내가 살아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죽는 길 밖에는 죄에 대해 승리하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죄에 대해, 육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승리하신 길은 죄에 대해 죽고, 육체에 대해 죽고, 세상에 대해 죽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교묘하게 사잇길을 찾고, 제 3지대를 찾습니다. 나의 욕구도 채우고 거룩함도 채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나 자신의 계획을 결재 서류처럼 들이밉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은 없습니다. 
죄의 힘은 하나님의 의의 능력과 동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죄는 물러갑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승리하십니다. 바울은 4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으며,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선한 능력이 역사하고 거룩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내가 죄에 대해 죽을 때,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할 때에 이 놀라운 길이 열립니다. 이 놀라운 길은 내가 관찰할 때, 인식할 때 열리는 길이 아닙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길과 행함을 동의어로 보았습니다.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6절은 우리가 얽매이던 무거운 것들에 대해 이미 죽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한, 기쁘고 가벼운 존재를 선물로 얻습니다. 그리스도가 열어주신 길은 새롭고 산 길입니다. 율법의 묵은 것, 전통적인 것, 인간들의 관례, 우리들의 상식과 이성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이성을 뛰어넘으면서 우리의 이성을 완성합니다. 감정을 뛰어넘으면서 감정을 완성합니다. 내 의지와 욕구가, 내 합리성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예수님께서 내 의지와 욕구와 합리성을 넘어서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을 온전한 형태로 다시 빚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새롭고 산 길이, 그 길이 행동이라면, 우리는 무슨 행동을 해야 할까요?
제가 이번 주일에 갑자기 유모차 바퀴 하나가 브레이크가 풀리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모차는 더 이상 온전히 굴러갈 수 없었습니다. 나머지 세 바퀴의 힘으로도 유모차는 굴러가지 않고 힘만 많이 들어갔습니다. 희한하게 예배를 드리기 전에 고장이 났다가,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는 다시 온전하게 바퀴가 굴러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에스겔에 나오는 하나님의 수레를 움직이는 네 생물과 바퀴를 떠올렸습니다. 
에스겔 1:20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1:21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그 영이 거하는 곳의 특징은, 하나님이 가고자 하시는 곳으로 그저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생물들에게 바퀴가 있는데, 생물들이 가고자 하면 바퀴들도 따라갑니다. 그 바퀴들 가운데에 생물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몸에 하나님의 영이 있으면, 나는 하나님이 가고자 하는 대로 나아갑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에 하나님의 영이 있으면, 교회는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새롭고 산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고 산 길로 초대하십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던 마음에서 용서하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새로운 산 길, 
다른 이를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에서 그를 귀한 하나님의 지체로 바라보고 거룩하게 사랑하는 새로운 산 길,
탐욕으로 나를 채우려는 마음에서 연약한 자를 돌아보고 섬기는 쪽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새롭고 산 길,
나의 야망과 계획이 아니라 나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에로 자유하고 가볍게 흘러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채우고 있는 이 브레이크를 스스로 풀기만 하면, 우리는 주의 영이 가시는 대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브레이크, 이 율법주의의 무거운 것은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풀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을 마음에서 풀어 주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꿈에서 존경하는 목회자 선배가 나왔는데 아직까지 그 꿈이 너무도 생생해서 그 감정까지 기억합니다. 그 목사님은 자기가 이제 이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놀라서 이유를 물었는데 이 교회에서 자기가 너무 큰 상처를 받고 인간적인 멸시를 경험하여서 그렇게 하면서까지 섬길 수는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아직도 그 꿈에서의 감정이 생각납니다. 비난이나 원망이나 정죄가 아니라 마음이 너무나도 찢어지게 아팠습니다. 꿈에서 깼는데도 그 아픈 마음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왜 그렇게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를, 용서와 사랑의 자유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를 보며 느끼는 하나님의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아픔과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화해는 거저 주어진 것도 아니며, 말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화해와 용서는 하나님의 아픔을 겪는 희생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희생이 없는 속죄제, 희생이 없는 화목제는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의 고난으로 새롭고 산 길을 여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제사를 주께 올려드리고 있습니까? 말 뿐인 화해와 말 뿐인 용서, 관념 안에서의 용납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아프고, 내 살이 찢겨지며, 내 눈물이 흐르는 희생의 용서, 희생의 사랑이 없이는 새롭고 산 길이 결코 열릴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를 보며,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질식하기 직전의 상태로 비명을 지르실 것입니다. 
내가 브레이크를 풀 때, 나머지 바퀴도 자유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네 생물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내가 매고 내가 푸는 여부에 따라 나의 이웃이 자유하고 기쁠 수 있고, 다같이 이유를 모르는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 마음의 빗장을 풀고, 정말 주가 원하시는 그 희생과 용서의 사랑으로 나아가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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