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7월 21일 아침설교, 로마서 8:1-15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7월 21일 아침설교, 로마서 8:1-15

jo_nghyuk 2022. 7. 21. 13:09
7월 21일 아침기도회
찬송 430장 통 456
  •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말씀: 로마서 8:1-15
  • 내가 갈 수 없던 길이었으나
 
원래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기능은 정죄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듯이 육신에 속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율법의 기능은 정죄의 기능이 됩니다. 
그러나 정죄하는 율법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죽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죄인을 정죄하지만 죄인을 살리는 역할은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정죄의 법이 아닌 새로운 법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법은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법입니다. 바울은 오늘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살려주시고, 연약한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길을 열어 주시고 보여주십니다. 
 
내가 품은 생각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생각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생각을 품은 나에게 참 평안이 있는가? 주님 주시는 은혜의 감동이 있는가? 하나님에게 합당한 길에는 생명과 평안의 법이 작용합니다.
7절에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남자들이 군대 가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바로 개념이 있다. 개념이 없다 입니다. 이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잘 알고 내가 거기서 해야 할 역할을 인지하며 수행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개념이 있다고 칭찬을 받습니다. 반면에 개념이 없다는 것은 도저히 군대 생활이나 사회 생활과는 거리가 먼 생각과 행동을 할 때 그 사람을 개념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군대에 가자마자 개념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등병은 보통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이등병은 오랜 시간동안 선임이 옆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오랜시간동안 보고 직접  따라해보면서 점점 군인답게 되어갑니다. 선임들도 실수를 해도 대체로 관대하게 반응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개념이 생기게 되면, 이등병은 더이상 자신이 일반시민이 아니라 확실히 군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분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도 않고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사람,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이 되어야 군대를 이해하고 따르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게 됩니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세상을 이기는 성령의 능력이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안에 성령의 능력이 없어서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주인 되기 보다 나의 마음이, 세상의 영이 더 주인이 되어 있어서 복음의 힘이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거듭나게 하소서.
 
하나님은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매일 새로운 날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시는 기회이며 용서이고 사랑입니다. 새로운 날은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 생명과 자유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무거운 죄짐을 주께서 가져가셨습니다. 잘 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보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의 인도대로 걸어가면 됩니다. 부모 옆에서 부모를 닮아가는 아이처럼, 고참 옆에서 고참이 하는 일을 따라가며 군인다워지는 이등병처럼, 우리는 주의 평안 안에서 주가 시키시는 것들을 한 걸음씩 하나씩 해나가면 충분합니다. 복음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자유한 것이며 기쁜 것이며 나를 살리고 힘이 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영을 받았습니다. 
자녀의 영의 특징은 실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의 영은 자유합니다.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으로 힘차게 나아갑니다. 왜일까요? 자녀의 허물과 과실을 부모가 책임져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너의 짐을 나에게 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의 무거운 짐을 나의 가벼운 멍에로 바꾸어주겠다. 나와 함께 이 가벼운 것을 메고 사랑으로 동행하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안식을 주는 멍에입니다. 예수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우리 마음은 바위처럼 견고해지고 우리 생각은 바위에서 솟는 물처럼 맑고 상쾌해집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내 속의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은 내가 만든 길입니까, 성령께서 열어주시는 길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길을 내서 내 방향대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성령님과 함께 기쁨과 자유와 안식과 소망이 있는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다시 한번 여러분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은혜로 용서하셨습니다. 다시 죄된 삶, 육신의 삶으로 돌아갈지, 주가 부르시는 영의 삶, 의의 삶, 평강의 삶으로 나아갈지 우리는 다시 선택해야 합니다. 내 인생길을 나 혼자 걸어갈지, 주와 함께 걸어갈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은 이것들이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는 가능성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법은 완전히 멸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육체가 죄와 함께 완전히 죽을 때 나의 육신적인 생각도 죽었으며, 이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실 때 나는 오직 순종을 향한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나에게 불가능한 길이었으나, 전에는 내가 걸어갈 수 없던 길이었으나 이제 하나님으로 인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열렸습니다. 그리고 죄 또한 전에는 내가 가던 길이었으나 이제 하나님으로 인해 아예 불가능한 것이 되었습니다. 의인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우리에게 참 자유와 평강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춤추듯 동행하며 죄의 법의 두려움이 아니라, 그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우리가 믿고, 의와 평강과 자유와 기쁨의 길을 갈 수 있음을 믿읍시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제 새롭고 산 길을 하나님이 열어주셨고, 하나님이 나를 이끌고 가십니다. 나의 주관자는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매일 새롭게 주가 열어주시는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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