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7월 26일 설교, 로마서 9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7월 26일 설교, 로마서 9장

jo_nghyuk 2022. 7. 25. 22:28
7월 26일 새벽예배
찬송 503 통 383
  •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로마서 9장
  • 나에게 없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1절에 포함됨)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오늘 자기 마음에 큰 근심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근심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신데 율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이 에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지 않으시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배에 대한 법을 제정해주지 아니하시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구원을 약속하여 주지 않으시면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이처럼 전적으로 무능력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애초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행위가 아니라 은혜인 이유를 바울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서 찾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들입니다. 사라의 태는 이미 닫혔고 그들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의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힘으로 노력으로 만든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선물에 대한 믿음으로 받은 아들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구원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었으면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치우쳐 죄에 빠지는 죄인들입니다. 오래 참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 덕분에 오늘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자신의 구원받음에 대한 감사로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은 마음 속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유대인이었던 자신은 구원을 받았는데, 다른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들을 옥에 가두게 함으로 예수님의 몸을 아프고 상하게 한 자신은 구원을 받았는데, 왜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왜 나는 선택을 받고 저들은 선택을 받지 못하였는가 라는 질문앞에서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합니다.
 
바울은 지금 지식적인 해결을 위해 갈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되어서가 아닙니다. 이 아픔과 고통은 머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까지 고백합니다. 나의 형제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그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나 형제가 예수를 믿지 않고, 여러분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아, 나는 믿게 되어서 다행이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끝임없이 기도할 것이며 아픈 마음으로 중보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 기도했고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를 보게 된 사례들을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 고통스러운 사랑의 길을 계속 걸었습니다. 어째서 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까? 저들도 구원하여 주세요!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21절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바울의 사랑을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의 자리로 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끊임 없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에 섭니다. 예수님께서 서셨던 그 자리에 섭니다.
오늘 바울의 이 처절한 외침 앞에서, 내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내가 지옥에 가도 좋다! 라는 이 외침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이웃을 인식하고 규정합니다. 사랑으로 중보하기 보다는 판단을 내리고 관찰합니다. 우리가 오늘 애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것을 애통해야 합니다. 중보하는 자는 무엇을 알고 중보하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름의 형세만 쳐다보고 바람이 부는 것만 보는 사람은 절대로 나가서 씨를 뿌리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나가서 씨를 뿌려야 한다. 
우리가 가족의 구원을 위해, 이웃의 연약한 믿음을 위해 가운데에 서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중보해야 합니다. 바라건대 우리가 예수님 닮은, 중보자의 삶을 살기를 바라고, 가운데에서 다리를 놓는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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