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1일 설교, 로마서 13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1일 설교, 로마서 13장

jo_nghyuk 2022. 8. 1. 13:54
8월 1일 월 새벽기도
찬송 552 (통 358)
  • 아침 해가 돋을 때
말씀: 로마서 13장
  • 어둠 속에서도 빛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은 12장의 내용과 연결되어 생각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13장 1절의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12:21의 말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과 연결되어져서 읽혀야 그 맥락을 잡을 수 있습니다.
당시 교인들이 이 편지를 받을 때에 그들이 섬겨야 하는 위에 있는 권세들이란 로마 사회의 통치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이 말은 얼핏 보면 부조리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당연히 당시 교인들은, 아니 그렇다면 불의한 권세자에게도 복종하란 말이오? 하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시작합니다. 지금 내가 섬겨야 하는 로마 사회의 그 지도자들에게 권세를 주신 분이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지점에서 내적 갈등이 없이 바로 흔쾌히 순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보기에’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삽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에서 그 관점은 늘 조정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인격이 단련되어지는 순간은 자신의 관점에 대한 긍정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보다 다르게 볼 수 있게 될 때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행복감과 만족감만 느끼면 인격이 연약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다시 새롭게 되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 말하자면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될 때 성숙하여 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는 길은 쉽고 익숙한 길이 아니라, 부모나 스승 등이 우리를 이끌어 줄 때에, 또는 꾸짖어 줄 때에 열립니다. 
복종 혹은 순종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의 지평에 들어 잇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해해야 복종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나야 이해의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 뒤에 이해가 온다고 가르칩니다. 이해 뒤에 믿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뒤에 더 넓은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교인들이 권세자들에 대한 불신이 있을 때에 바울은 권세자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무질서함을 막기 위해 권세자들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내버려두면 나 자신의 탐욕을 좇고, 덕을 세우기 보다는 무익하게 되고, 하나님이 세우신 목표보다는 나 자신의 목표를 따르는 경향이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권세자들을 주신 것은 말하자면 질서를 위한 경계선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과 같습니다. 
질서자들이 외부의 경계선이면, 우리의 내부의 경계선은 각자의 양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모두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무언가 그릇된 일을 할 때에 누구라도 ‘어 이것은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양심의 가책을 받고, 죄책감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사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면 이 세상은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죄책감은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주시는 꾸중이며, 넘어가지 말라고 하는 경계선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계를 넘어갈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않을 때, 양심은 우리를 고발하며, 우리 안에서 소리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
 
우리들은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죄를 반복해도 된다는 허용이 결코 아닙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더욱더 깨끗한 양심을 가집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더이상 율법의 두려움으로 진노 앞의 불안함으로 형식적으로만 의롭고 선하게 살려는 무거운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가운데에서, 그 사랑에 대한 반응을 통해,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자유함 속에서 율법의 성취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은 자유로운 길이지만 완전히 자유롭고 자발적인 길일까요?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시지 않으면 내가 완전한 자유로 그것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늘 관계적인 자유입니다. 주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방되는 것이고, 이웃을 해방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자유롭게 통치하심으로 모두가 회복되는 길로 나아가게 하는 방향성을 가집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말고 탐내지 말라고 하신 명령은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웃 사랑은 언제나 이 구체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아라. 
바울은 12절에서 어둠의 일을 벗자고 말합니다. 그 말은 여전히 성도들에게 어둠의 은밀한 일들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어둠의 일을 벗자는 이 외침은 공감과 소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것은 내가 느끼고 원하는 바와 상관없이 그저 따라가야 하는 왕의 선포입니다. 자녀에게 주는 부모의 명령입니다.
왜 바울이 단정히 행하고 음란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다투지 말라고 합니까? 여전히 성도들이 어둠 속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은 더욱 깊어져 가고,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따르려 하지 않아도, 악이 문 밖에 서 있습니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악은 문 밖이 아니라 우리들의 손 위에서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로 옷 입지 아니하면 벌거벗은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의 영을 따라가지 아니하면 육신의 소욕을 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채가려는 어둠의 세력에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모두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우리의 왕은 외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가지 말고, 어둠의 일을 이제는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갑옷을 입지 않으면 싸울 수 없다. 군사가 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고, 아마추어적으로 살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철저하게 돌이켜서 승리하라!
너희 모두는 향방 없이, 목적없이, 되는대로 살지 말아라. 너희 인생의 답은 너희 안에 있지 않고, 너희를 이끌어가는 나에게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너에게 준 권세자들에 복종하라! 그것은 내가 너를 훈련하는 경계선이니 그 경계선을 벗어나지 말라. 때로 그 길이 버거울지라도 반드시 내가 그 과정을 통해 너를 연단하여 복되게 하고 빛이 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어둠을 통해서도 빛들을 단련하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도 우리가 주 예수로 옷 입고, 주가 주신 권세가 나를 단련하는 도구임을 믿고 주께 나를 드리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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