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3일 설교, 로마서 15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3일 설교, 로마서 15장

jo_nghyuk 2022. 8. 3. 00:44
8월 3일 수 새벽기도회
찬송 364 통 482
  • 내 기도하는 그 시간
말씀 로마서 15장
  • 함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
 
1절부터 7절까지는 우리가 어제 다루었던 내용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 너희가 서로 받으라.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어떻게 받으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유대인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할례는 받으면 안되는 것에 속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유대인의 전통인 할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금기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할례를 받으신 이유는 8절이 말하듯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할례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 직접 할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여전히 신실하심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9절의 이방인들에 대한 긍휼하심은 8절의 유대인을 향한 신실하심과 마치 짝을 이루듯이 바로 구절이 이어져 진행됩니다. 이방인들 또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주의 백성과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 이미 구약을 통해 기록되어 있다고 바울은 9-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제는 열방이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믿음의 강한 자와 믿음이 연약한 자는 주 안에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유대인이고 약한 자가 이방인이냐?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율법에 매이지 않고 믿음으로 주를 의지하는 이방인이 믿음이 강한 자가 될 수 있고 여전히 할례와 율법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이 믿음이 약한 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공평하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소망을 두는 자가 믿음이 강한 자이며 거기에는 출신과 신분, 성별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분이 이방인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직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 즉 마게도냐의 북쪽 지역으로 바울이 전도한 곳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지역까지 복음을 편만히 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곳에는 가지 않았고, 교회가 이미 있는 지역이 아니라 교회가 없고 예수를 모르는 자들에게로 전도여행을 늘 떠났습니다. 바울은 23절에서 이제는 이 지역들 안에서는 자신의 일을 다 마쳤고 다음 전도여행을 가기 전에 예루살렘을 향할 것이며 그후에 오래전부터 계획하였던 서바나 전도여행 길에 오르며 로마교회를 방문할 것이라 말합니다. 당시 각지에 있던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헌금을 준비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도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이방인 교회성도들이 이제는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고 사랑으로 함께 함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 당시의 교회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서로 위하고 물질적 영적인 도움을 서로 주고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빚을 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영적인 빚을 나중된 자가 갚을 수 있는 길 중에 하나는 그들의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연대는 단순히 심정이나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한 것들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즉 물심양면으로 돌봐주고 섬겨주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함께 기도에 힘을 같이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이 이 헌금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는데,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저항과 박해가 심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 정도면 하루에 기도를 몇 시간씩 할 텐데 기도가 필요한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기도 요청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어떤 지도자도 중보기도를 받지 않고 온전히 사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사님들을 위해,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역에 걸림이 없기 위함입니다. 제가 사역을 하다가 너무 버거울 때면, 헨리 나우웬이 고백하듯이 마치 악한 영의 세력들에게 짓눌려 있는 듯한 느낌이 저도 들 때면, 중보기도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나면 정말로 그것들에게서 벗어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자유케 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18-19절에서 자신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역사하신 것이며, 나를 통해 역사하셨지만 내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바울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면 중보기도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지만, 이 사역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중보기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기도의 분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수련회를 준비할 때나, 찬양인도 사역을 할 때나, 기도회를 이끌 때나, 기도의 분량이 장성하게 채워지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남다릅니다. 깊은 임재가 있고 거룩한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분량이란, 사역자 단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모두가 채워야 하는 분량이기도 합니다. 그 기도의 분량에 따라 시험을 공동체가 넘어가기도 하고, 사역자가 시험을 통과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일의 능력있는 역사를 중요한 몇몇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해 보듯이 유대인의 복을 이방인이 나누어 가지게 하시고, 이방인이 유대인의 궁핍함을 채워주게 하심으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빈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집사님들을 통해 큰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른 새벽 예배당에 나아와 눈물로 중보하시는 권사님들을 통해 한국교회에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채워야 하는 기도의 분량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시는 분량이 제각각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손을 모아, 연약한 무릎을 꿇고 주께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을 넘어가기 위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역량만으로는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에도 큰 시험이 드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하고, 예수님께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꿈꾸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가 없어서 시험에 드는 우리가 아니라, 다함께 뜨겁게 기도함으로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만이 살 길이고, 기도만이 능력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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