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4일 설교, 로마서 16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4일 설교, 로마서 16장

jo_nghyuk 2022. 8. 3. 18:56
8월 4일 목 새벽기도회
찬송 502장 통 259
  • 빛의 사자들이여
말씀 로마서 16장
  • 그리스도 안에서 문안하라
 
어제 우리는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사실상 바울의 교리와 윤리에 대한 편지의 내용은 15장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16장까지 이어집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가 무엇을 알고 결단하는 것을 넘어서서 16장을 통하여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구체적인 과정을 이 로마서의 마지막 장이 그리고 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16장의 대부분의 구절들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 뵈뵈 자매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동역자들과 사람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바울의 교회를 위해 추천하는 사람, 바울이 동역자라고 여기는 사람들,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눈여겨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냐가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문장들마다 바울이 술어로 붙이는 '문안하라'는 명령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목숨을 내놓고 사역하였고 누군가는 크게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형제들, 자매들, 일가 친척들과 그들과 함께 있는 이웃들을 향해서도 문안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이 문안하라는 수많은 문장들의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24절의 말씀은 문안의 목적이 예수의 은혜를 나누는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문안은 예수의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바울이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를 추천하는 이유는 그가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큰 보호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뵈뵈 자매를 맞아들이고 그의 필요한 것을 도와주면서 그들은 뵈뵈 자매로부터 선교의 과정에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들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놀라우심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고, 그들의 믿음이 강화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절에 등장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문안하면서는 그들이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사역하는 담대한 믿음과 헌신을 보게 되었을 것이며 그를 통해 성도들 자신의 믿음에 도전을 크게 받았을 것입니다. 목을 내놓고 사역하였다는 이 표현은 원문으로는 자기 목을 사형 집행자의 도끼 밑에 내어놓았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감수한 어려움의 크기를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믿음은 성도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에배네도에게 문안할 때에는 그가 아시아에서 바울이 처음 맺은 열매라고 말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아시아의 첫 신자가 되게 된 과정을 성도들이 듣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새로운 사역을 이끌어 가시는지 그 놀라운 과정을 들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일본 선교 현장에 가보면 현지의 일본인 신도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영접하였고 예수께서 역사하셨는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은 감동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크심을 찬양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 외에도 마리아, 안드로니고, 유니아, 암블리아 등등 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각각의 사람들의 이름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각각의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간증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문안하면 문안할 수록 우리는 더 크고 다양하게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각각의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듣게 됩니다. 문안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그를 집으로 맞아들이고 환대하며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든 교제의 과정을 포함합니다. 이 문안들을 통해 로마교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체험하고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안 인사 중간에 17절에서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는 권면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미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때에 그들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만남 가운데에 예수께서 주가 되시지 않는다면 만남 자체를 위한 만남을 주의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주의하는 지점은, 문안해야 하는 수고한 사람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이름들은 열거된 반면, 이 17-18절에서 등장하는 교훈을 거스르고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는 그러한 이들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유독 로마서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 분쟁을 일으키고, 미혹하는 자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로마서의 특징입니다. 
저는 반대로 그 사람들의 이름을 로마서에 바울이 기록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만약 바울이 그들의 이름을 기록했다면 그들이 다시 회개하고 주께 돌아올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 반대일 것입니다. 회개는 용서가 먼저 주어질 때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마귀에 대한 용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7-20절에 대적자들에 대해 언급하지만 사탄이라는 대명사 이외에 다른 어떤 이름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제까지 우리가 다룬 본문들을 통해 알 수 있듯 바울은 자신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그들을 위한 중보의 자리에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16장에서 이 대적자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회개하며 한 사람도 잃어버리길 원치 않으시는 인애하신 사랑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엄위하신 분이셔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애하신 분이셔서 그 죄인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세상 그 어떤 의인이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의인 아흔아홉명의 예배보다 죄인 한명의 회개를 기다리시고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소외된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이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편지의 마지막은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는 말로 마무리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의는 이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것, 판단하시는 것이 본의가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것, 잃어버린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우리도 한 영혼을 향한 우리의 시각과 마음을 달리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그 연약한 사람,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원하는 그 잃어버린 한 사람, 길을 잃은 그 한 사람을 위해 우리는 기도하고 문안해야 합니다. 어제는 중보의 자리를 강조했지만, 오늘 16장을 통해 우리는 문안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찾아가야 합니다. 수고한 영혼, 충성된 영혼도 찾아가고, 잃어버린 영혼, 소외된 영혼도 찾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땅 끝 서바나까지 가듯이 우리도 빛이 아직 비추이지 않은 그곳으로 끊임없이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문안은 우리들끼리의 문안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주인으로 하는 문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고 주가 마음을 주시는 곳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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