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5일 설교, 고린도전서 1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5일 설교, 고린도전서 1장

jo_nghyuk 2022. 8. 4. 18:15
8월 5일 금 새벽기도회
찬송 305장 통 405장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말씀 고린도전서 1장
  • 다시 처음 믿었던 그 마음으로
 
어제부로 로마서가 끝나고 고린도전서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라고 하는 지역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사이이면서 아시아나 크레테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항구를 면한 지역이었습니다. 여러 도시들의 다채로운 문화들이 이 고린도 지역에 모여들면서 고린도 사회는 지혜와 학식이 풍부한 이들, 그리고 여러 문화가 풍성하게 존재하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 또한 지혜와 학식이 풍부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서를 통해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받은 은사도 매우 풍성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많았고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받은 것이 풍성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방향, 거룩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 부정해지고 음란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모든 언변과 지식에 풍족하다고 5절에서 말하며 7절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8절에서는 주께서 너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와 학식에 있어서, 그리고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넘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책망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지혜와 지식으로 인해 교만해졌고, 다양한 문화와 이방종교를 만나면서 음란해졌습니다. 혼인 관계를 거룩히 지키는 자가 별로 없었다는 암시가 고린도서를 읽으면서 계속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거룩함과 하난님의 구별하심을 강조하며 편지를 시작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입고 부를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헬라어 엑/클레시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 방향을 뜻하는 ek과 부르다라는 뜻의 kleo로 이루어진 합성어 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온 구별받은 존재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늘 이 구별성이 존재합니다. 교회는 늘 세상 가운데 존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과 섞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거룩하게 구별받아 나아오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을 다시 한번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십니다. 구별된 자들로 세우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학식과 지혜로 인해 교만했습니다. 교만의 특징은 구별이 아니라 분리입니다. 구별된 사람은 여전히 세상 속에 있고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그 속에서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끊임없이 세상과 자기를,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분리시킵니다. 바울은 이런 분열의 이슈가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하나로 불러내셨다. 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하나가 되게 하셨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 모두를 하나님 앞으로, 한 방향으로 부르셨고, 지금도 부르고 계시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가장 첫번째 권면은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분열의 원인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한다는 그룹이 있고, 나는 아볼로에게 속한다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나는 게바에게 속한다는 그룹도 있었고,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울, 아볼로, 게바 파로 나뉘어진 것이 잘못인 것은 압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그룹은 얼핏보면 올바른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그룹은 이 나뉘어진 나머지 그룹을 정죄하는 영적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 13절에서 묻는 바울의 반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그룹은 이 나뉘어진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자기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고 공동체의 문제와 아픔에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하나되게 하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되게 하는 길을 사람에게 알려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 원인이 바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교만한 마음, 높은 마음, 판단하는 마음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겸손한 본을 먼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적이 없다. 나는 일부러 세례를 많이 베풀지 않았다. 사람이 바울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집중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세례를 베풀지 않고, 나 자신은 뒤로 물러나 주의 말씀만을 선포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신학적인 탁월함이나 언변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전파합니다. 19절에서 보이듯 하나님은 지혜 있다 하는 자들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전도의 미련한 방식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셔서, 하나님께서 가시는 길에 지혜가 있습니다. 내가 그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가시는 그 길에 참된 진리가 있습니다. 
22절에서 바울이 말하듯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지자의 특징은 그들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기적적 능력에 있었습니다. 헬라인에게 있어서 예언자의 특징은 뛰어난 지혜와 그것을 구사하는 언변의 엄밀함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기적도, 지혜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23절에서, 십자가에 그리스도가 못 박힘은, 즉 십자가에 주라 불리우는 하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심은, 지혜로워보이지도 않고 그 어떤 능력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고 무능력해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구별을 입은 성도들, 교회들은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죽으신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분임을 알고, 그 그리스도가 바로 만물의 근원이 되는 로고스, 세상의 근본이 되는 지혜이심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5절에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나아가 연약한 자, 지혜롭지 못한 자, 세상에서 세력이 강하지 않은 자를 택하셔서 사역하십니다. 26절에서 바울은 교인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보기에 지혜롭거나 능력있거나 문벌 좋은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심으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심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해서 세상의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믿음 될 수 있고, 은혜가 은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떠함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고 자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이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를 주장하며, 자신의 바울에 속한 정통성을 자랑하거나, 아볼로에게서 배운 성경의 학식을 자랑하고, 또는 베드로에게 속한 유대인으로서의 또 다른 정통주의를 자랑하였지만,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헛된 것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은 십자가의 약한 것과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통해서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신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을 들은 성도들은 마음 속에 모두가 '초심'이라는 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만났던 그 순간, 처음 하나님을 만나 감격했던 그 시간, 죄인으로서 주를 만나고, 어리석은 자로서 주의 말씀을 만나는 그 시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헛된 이름을 붙들고 있고, 자신의 학식과 지혜를 의지하거나, 능력 있음을 의지하던 것들이 모두 헛된 것이며, 다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쌓아올린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선포하고, 그것들을 폭파시킵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교회의 기촛돌로 삼으십니다. 우리도 이 시간 우리가 의지하던 것이 십자가의 예수님이 아니라면, 다시 처음 믿은 그 시간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새벽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주 발 앞에 내려놓고, 다시 주님으로 출발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을 모두 잠재우고 예수님으로 출발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과의 동행만을 삶의 의미요 기쁨으로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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