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8일 설교, 고린도전서 2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8일 설교, 고린도전서 2장

jo_nghyuk 2022. 8. 8. 04:48
8월 8일 월 새벽기도회 
찬송 302 통 408
  •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말씀 고린도전서 2장
  • 나의 자아의 언덕을 떠나서
 
1절을 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증거는 증인들을 통해 증언되는 것들입니다. 증인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만을 증언하며 그 외에 다른 것을 붙이거나 빼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전하지 않겠다”고 작정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가진 다른 힘들을 의지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겠다는 복음의 순수성을 향한 의지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이 다른 것들을 의지하지 않자 바울의 연약한 있는 모습 그대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면서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것을 교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사람들이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우상화하는 위험한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그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강함 뿐 아니라 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약한 바울을 통해서 더 강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가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약한 모습 그대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힘을 빼기 보다는 힘을 주고 주님을 따라가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힘을 빼고, 나의 생각에서 힘을 빼고 그저 따라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나의 자리를 내어드릴 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강하게 임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시고, 하나님께서 왕이 되실 때 하나님은 더 강하게 임재하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언변과 나의 재능과 나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임재에 우리가 더 민감해야 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 사람의 것들을 다 치우고 사역했습니다. 주의 능력만 나타나기 위해 자신의 연약한 중에서 사역하였고 그 연약함을 가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의 아픔을 숨기고 사역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약점을 가리고 사역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통해 사역하였고, 자신이 초라해질지언정 복음에 다른 인간적인 능력을 섞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면 연약함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정신이 이상하다고 여김을 받을 정도로 자신의 상식 바깥으로 넘어갈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컴포트 존을 벗어나면 작아지고, 이상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이 느껴지면 지경을 넘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지경을 넘어가는 일은 영웅적인 일도 아니고, 모험의 도전도 아닙니다. 오히려 작아지는 일이고 약해지는 일입니다. 소라게가 다음 소라를 집으로 삼아 건너가는 과정은 벌거벗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과정은 십자가의 벌거벗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성장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교회와 수수한 교회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듯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우리 신앙의 성장과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기도가 쌓인 장소와 기도가 쌓이지 않은 장소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기도가 먼저 쌓여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가 이 세상의 지혜와 달라서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 감추어진 영광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분별은 하나님의 지혜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셔야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주님의 일을 분별치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먼저 알아서 가르치겠느냐.
그 누구도 주님의 마음과 계획을 먼저 알 수 없습니다. 순종하기 전에는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을 분별치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다음에 무슨 일을 하실지를 예상해서 순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만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였습니다. 순종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지만 하기 때문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별하게 되면 순종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전까지 우리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가시는 길을 인정하고 그 길로 걸어가지 않으면 그 전까지 우리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나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강한 사람은 나의 강함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령께서 가는 길을 가는 사람이 지혜롭고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강함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것들을 의지하느라 힘을 빼지 못하고 하나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27-28을 보면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시고, 약한 것들, 천한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일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약한 자들은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강한 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으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고 주님만을 자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 우리는 그 지혜와 그 영광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못 박히셔야 했을 때에도 주님도 알지 못하시고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알지 못하고 순종하는 자리이며, 알지 못하고 죽기까지 순종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나의 마음보다 순종이 더 중요한 자리이며, 나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중요한 자리입니다. 
우리 신앙의 자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출발점임을 명심하십시오.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불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알려고 하기 보다는 모르지만 순종해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나와 하나님이 씨름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려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십자가 앞에서 넘어지고 실족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자아가 작동하기 때문이고 자아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의 수준보다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알고 가려고 하면 십자가 앞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지만, 모르지만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따라가면 우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멀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순종할 때,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멀리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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