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10일 설교, 고린도전서 4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10일 설교, 고린도전서 4장

jo_nghyuk 2022. 8. 10. 18:04
8월 10일 수 새벽기도회
찬송 333장 통 381
  • 충성하라 죽도록
말씀: 고린도전서 4장
  • 세상의 중심 vs. 세상의 가장자리
 
바울은 자신을 종으로 표현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할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 복음의 사역을 맡기신 분께서 그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는지 여부를 판단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그것을 통하여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의 양심을 살피면서 사역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장차 자신을 심판하실 것을 알기에 맡기신 것에 대해 두려운 마음으로 늘 사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가 이미 왕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바울의 말은 이미 그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스스로 앉아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이 어둠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실 텐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왕의 자리에 앉아 서로를 판단하고 있고, 심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6절에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기록된 말씀이 명하는 것은 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넘어간다'는 말이 가진 의미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 바깥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서로 받으라고 하시는데 그 말을 넘어가서 서로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성경을 보니 이 대적하는 것이 나의 교만을 낳는다고 합니다.
 
교만한 마음에는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구별의식이 있습니다. 나를 남과 구별하여 높이는 것도 교만이지만 다른 사람을 낮게 여기는 것도 교만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하고 뭅습니다. 실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는 이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영적 우월의식.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우리 없이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고린도교회가 사도의 어떤 훈계나 권면도, 지도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있구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은 사람은 훈계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음이 높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가 얼마나 낮은 자인지를 보여줍니다. 보통 높은 사람을 낮추려면 자신이 더 높아져서 내리눌러야 한다고 여길텐데, 바울은 반대 방향으로 달립니다. 9절을 보면, 사도인 우리를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뜨머리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끄트머리는 세상의 가장 끝자리를 말합니다. 이 자리는 세상의 중심, 왕의 자리와 가장 반대에 있는 자리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한 쪽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면서 높아질대로 높아지고, 다른 쪽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낮아질 대로 낮아집니다. 
한 쪽은 그리스도의 자녀의 특권을 얻게 되었고 다른 한 쪽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세상의 찌꺼기가 되었습니다.
한 쪽은 이 권리를 권리대로 다 누리면서 영적 우월감을 느끼고, 다른 쪽은 이 권리를 다 포기하면서 자신의 낮음을 고백합니다. 
둘 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인데 사는 방식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자녀됨에는 집중하지만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에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구가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섬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권리를 다 누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용납받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을 용납해주는 데에 있어서는 인색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전자의 사람들이고, 사도들은 후자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읽으면 고린도 교인들이 참 어리고, 개념이 없고,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 사도가 비난을 할 텐데, 사도는 비난을 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모든 심판과 판단은 주님의 자리라는 것을 알고, 다만 자신들은 세상의 끄트머리에 위치해있다고 오히려 고백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향해 사랑하는 자녀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목적은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 같이 권면하는 것이라고 14절에서 말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스승을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를 자처하는 사람은 없다. 
스승과 아버지의 차이점은 그가 너희의 삶을 책임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스승은 그 말한 것에만 책임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 않은 자녀를 향해 책임이 있다. 그저 말로 가르치는 이들은 너희가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를 버리지만 아버지는 자녀를 끝까지 양육할 책임이 있다.
나는 그러므로 너희를 지금 부끄럽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로서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를 본받듯이, 너희는 내가 사는 모습을 본받아서, 낮은 데로 가고, 권리를 포기하고, 용납해주고, 자유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종과 같이 되거라. 세상에서 더 얻으려고, 더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더 나누며 풍성한 삶을 살거라. 우리 사도들의 모습을 보라.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어서 세상의 끝자리에 앉았다. 세상에서 영광과 부귀를 추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느라 그 분이 가신 곳을 가다보니 세상의 끄뜨머리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부요함에 눈이 멀어 세상의 중심에 앉아 있구나. 나는 너희를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치겠다. 나를 따라오거라.
우리 삶에서 자기 삶을 본 받으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바울은 우월감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교인들이 가야하는 방향을 먼저 걸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또한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보고 본받습니다. 내가 포기하지 않은 것 본 받고, 내가 용서하지 않은 것 본 받습니다. 내가 권리를 자꾸 취하고 자유를 다 누리는 것 본 받습니다. 우리에게 스승과 아버지가 있듯이 우리도 누군가의 스승과 아버지가 됩니다. 
내가 용서하면 그것을 다음 세대가 본받습니다. 내가 희생하면 그것을 다음 세대가 본받습니다. 내가 낮아지면 그것을 다음 세대가 본받습니다. 다음 세대는 이전 부모의 세대를 본받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사도를 가진 고린도 교회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가진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따라하라고 하시고 본받으라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있고,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우리를 본으로 삼는 귀한 삶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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