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12일 설교, 고린도전서 6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12일 설교, 고린도전서 6장

jo_nghyuk 2022. 8. 11. 18:20
8월 12일 금 새벽기도회
찬송 350 통 393
  • 우리들이 싸울 것은
말씀: 고린도전서 6장
  • 정의와 용서
 
바울은 어제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형제 간의 일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미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 앞에 가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 때에 그리스도인이 지혜롭게 판단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믿지 아니하는 방식을 따라서 그 사건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시대의 맥락과는 약간 다를 수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돈을 받고 송사를 굽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가져가는 것이 공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반대가 됩니다. 바울은 4절에서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운다고 말함으로 이를 암시합니다. 이는 믿지 않는 자를 의미하기 보다는 공정성에 대한 암시가 더 강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들을 공정하게 재판하라고 구약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자라고 두둔하지 말며 또한 약한 자라고 해서 그의 편을 무조건 들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공정함 뿐 아니라 교회는 또 하나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세상 재판에 가져가서 치루는 일의 공정함은 공정하게 서로의 몫을 서로가 가져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공정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상의 가치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의 것을 취하기보다는, 또는 내 것을 주장하고 움켜쥐기 보다는 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피차 고발함으로 이미 너희 모든 사람 가운데에 뚜렷한 허물이 있다. 바울은 교인들 간의 서로 고발하는 문제로 인해 이제 그들에게 모두 죄가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먼저 온전히 판단해야 하는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여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기도문은 잘못이나 죄를 옹호하는 기도문이 아닙니다. 허물이나 죄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용서한다는 행위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우리 죄를 사해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가 있으며, 서로의 허물을 끊임없이 만날 수 밖에 없으며 끊임없이 그 죄를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기도문이 함축하는 의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우리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바울로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면, 너희 가운데 뚜렷한 허물이 있다는 것은, 공정함은 주장하지만 용서는 행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에서, 그리고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해 세상 법정에 가는 그 모습에서 교회의 용서와 사랑에 대한 역할을 다하지 않는 허물에 대해 책망을 받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차라리 당해주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원수가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악을 이기기 위해 악한 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바울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에게도 선대하라 하셨는데 이 교인들은 자신의 형제 자매들에게도 세상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8절: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바울은 9-10절에서 어제 이야기했던 교회에서 징계해야 하는 사람의 목록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음행,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욕, 술 취함, 모욕, 속여 빼앗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11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이같은 자들이 (예전에) 있더니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들이 어떻게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화해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그렇게 살았을지라도 주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그 죄를 깨끗이 씻음받고 거룩한 삶,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자가 그 자격을 얻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게까지 해주시는 엄청난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빚을 탕감받은 자의 심정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우리도 서로서로 용서해주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발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보면 이 명령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고발을 하게 되면 상호 간에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당시 법정에서는 재판이 공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판은 공정함을 추구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기기 위해 하는 것으로 기능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정함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정의만으로는 회복적인 미래를 꿈꿀 수가 없게 됩니다. 한쪽이 이기고 다른쪽이 지고, 한쪽이 선하고 다른쪽이 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죄를 사해주신 것은 우리가 선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악해서이며, 우리가 공정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불의하기 때문에 그런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교인들을 보니 십자가를 지기 보다는 서로 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공정함을 주장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고 그것은 오히려 서로 안에 허물과 불의를 키우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몸이 주를 위하여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임으로 음란을 피하고 거룩한 주님과 합하여 더욱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특별히 음행을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죄악들은 몸 밖에 지는 것인데, 음행은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이 계속 이야기하듯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리고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개개인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또한 논점입니다. 우리 몸들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는 성전이라면, 그리고 교회가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지체들의 모임이라면 우리 몸은 개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나의 몸은 성전의 일부입니다. 내가 나의 몸에 죄를 짓는 것은, 음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내 몸을 가꾸고 거룩하게 하는 것은 주의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세우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공동체적 몸을 이룬다는 것은 나의 죄가 다른 지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며, 반대로 하면 나의 거룩함이 다른 지체를 살리고 세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죄가 은밀하며 나만 짓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주의 몸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바울이 여러 장을 할애해서 경고하는 음행의 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기 쉬운 죄라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예수님께서 값으로 치루고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영광을 돌리라
죄인이던 나를, 더럽던 나를 구해주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값을 치루고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죽어야 하는 내가 이제 사는 것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이 주는 가장 희망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거룩해질 수 있고,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주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우리의 몸을 통하여 주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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