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16일 설교, 고린도전서 8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16일 설교, 고린도전서 8장

jo_nghyuk 2022. 8. 15. 20:59
8월 16일 화 새벽기도회
찬송: 311 통 185
  • 내 너를 위하여
말씀: 고린도전서 8장
  • 사랑의 다른 이름, 권리포기
 
우리가 고린도서를 시작하며 다루었듯이 고린도 교인들은 지식수준이 뛰어난 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르침을 따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믿음이 연약한 성도도 있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연약한 성도들이 실족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 둘의 입장이 충돌하면서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의 믿음 연약함을 질책했을 것이고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거리낌없이 먹는 것을 판단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번 더 고린도 교회 내부의 다른 갈등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편지의 일부를 할애하여 권면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바울이 1절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교만하게 한다는 말은 스스로를 높인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덕을 세운다는 말은 함께 든든히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지식이 아무리 올바른 것이어도 그 지식 때문에 스스로가 높아지기만 한다면, 그래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교만하게 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을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은 내가 높아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는가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기독교 영성가를 아십니까? 그가 분별력이라는 책에 쓴 이야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가 하버드 대학 교수를 하다가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기독교 공동체인 라르쉬 공동체를 찾아갔을 때, 그곳의 사람들은 나우웬이 교수이거나, 하버드 대학이라는 타이틀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우웬이 자신들을 오늘도 사랑해줄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헨리, 나를 사랑해줄 거에요?’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은 5년 동안 이 질문만 했습니다. ‘집이 어디에요?’ 나우웬은 이 질문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나서 이 장애인이 자신의 삶의 이정표와 같은 존재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있는지를 묻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나우웬이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고 이 장애인들을 교만하게 판단했다면 그는 이들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우웬은 이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을 추구하는 삶이 좋은 삶이 아니라 사랑을 추구하는 삶,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삶이 자신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는 지식을 쌓아서 성숙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식은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알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지식으로서 우리가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계발을 추구하는 것이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돌보고 아끼는 사람, 가진 것을 내어주는 사람이 진정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은 늘 이웃사랑과 연결이 됩니다. 보이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요한일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우상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이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 우상에 대한 제물로 알고 먹고 있기 때문에,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말합니다. 물론 그들이 그 바른 지식을 알게 되어서 다같이 고기를 먹는 방향도 존재하지만, 거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연약한 사람은 연약함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연약한 이들이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습관이라 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 이전에 내 안에 깊게 자리한 의식세계와도 같습니다. 지식을 받아도, 알게 되어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는 내면의 깊은 상징체계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을 듣고 제물을 먹었다가도 다시 하나님 앞에 연약한 마음으로 인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약한 자들은 천천히 강해질 수도 있고, 강해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필요한 것은 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강한 자들이 주도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우웬이 갔던 라르쉬 공동체는 장애인들이 주인이고 비장애인들은 조력자로서만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강한 사람들, 지성적인 사람들,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 잘 나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으뜸이 되어야 하고, 강하다 하는 사람들은 겸손히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강한 것도, 지성도,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 앞에 하나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음식을 먹고 먹지 않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함께 누리는 것들이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자유를 누리고 누리지 않고가 하나님에게 계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의 유익일 뿐이다. 스스로의 유익보다 귀한 것은 내가 낮아지고 함께 든든히 서는 것이다. 강한 자가 낮아져야 다 같이 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지식 있는 것으로 하나가 되지 않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의 다른 이름은 권리포기입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나에게 마땅한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가 공동체의 이웃을 넘어지게 만든다면, 나의 자유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면 나는 그것을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권리포기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고, 땅에 내려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영광을 누리셔도 됩니다. 죄인은 여전히 자기 죄로 죽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이웃의 유익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거창한 것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유익을 조금 포기해서 다른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나눔을 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절약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나눔은 남는 것을 주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리는 것을 제약해서 나온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삶에 이러한 것을 실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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