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17일 설교, 고린도전서 9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17일 설교, 고린도전서 9장

jo_nghyuk 2022. 8. 16. 17:26
8월 17일 수 새벽기도회
찬송: 354 통 394
  • 주를 앙모하는 자
말씀: 고린도전서 9장
  • 복음을 위해 참는 자들
 
바울은 8장에서 고기를 먹는 권리 포기에 대해 이야기한 후에, 이제 사도로서 자신이 행한 권리 포기에 대해 9장에서 말합니다. 권리 포기의 전제는 먼저 그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나는 자유인이고 사도로서 권위가 있는 사람이다"는 것을 먼저 말한 후에, 자신이 먹고 마실 권리가 있으며, 결혼을 할 권리도 있고, 따로 생활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례를 받아 일할 권리가 있음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은 이 모든 권리를 누리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천막을 짓는 일을 부업으로 하여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역자가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거나 올바른 것이 아님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7절: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올바른 방향은 사역자가 말씀을 전하고 공동체는 그 사역자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밭을 가는 소 또한 먹을 곡식에 대한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소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한 것으로 인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을 마땅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사역자들에게 적용시켜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나눈 사람은 물질적인 것을 얻는 것이 바람직한 질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바울이 이 권리를 가졌음에도 "참고 있다"는 표현이 12절에 나옵니다. 이 권리는 마땅한 것인데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생길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바울의 형편을 돌보지 않는 상황에서, 마땅히 사역자를 돌보아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바울은 참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한 정황이 올바른 것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권리를 내려놓은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레위인들이 제사를 지낸 후에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을 다시 받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일을 하는 이들이 자기 형편에 매이지 않고, 복음 전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율법을 통해 제사장들을 돌보는 장치들을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례를, 후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물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그것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이었지만 바울은 사례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값없이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자랑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받을 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고 참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자체를 전하는 것은 사명이기 때문에 반드시 전해야 하는 것이지만, 복음을 전하면서 받아야 하는 물질적인 후원 또한 마땅히 받아야 하는 권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명은 다하였고, 자신의 권리는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그 권리를 챙겨달라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침묵했던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의 신분은 로마시민으로서 자유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사도라는 직책은 아주 높은 직책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19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의 모양이 되어 그들을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갈 때 바울은 유대인의 모양으로 갔습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갈 때에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면서 율법주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들에게 갈 때에는 그들의 연약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율법 없는 자처럼 나아갔습니다. 약한 사람들에게 나아갈 때 바울은 강한 모습이 아니라 약한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만 몇 사람이라도 주님께 돌아올 수 있는 복음의 문이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복음 전하는 것과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때에 바울이 전하고 누린 복음은 복을 받아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소외된 영혼을 만나 그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것이었고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거치는 돌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때로 참고 침묵하게 하십니다. 내가 참아야 약한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복음은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절제, 권리포기가 하나님께 받을 상급으로 돌아올 것을 믿었습니다. 이 땅에서 기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서 받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소망은 참으로 하늘 소망이었고, 천국 소망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을 듣는 자는 많으나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자는 적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승리하기 위해 절제한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 몸을 치는 복종을 하고 있다고 바울은 27절에서 말합니다. 상을 위한 달음질은 훈련이 없이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 훈련을 할 때에도, 말씀 훈련을 할 때에도 가장 어려운 것은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의식적으로 몸을 돌이키지 않으면,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에서 사람은 훈련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훈련을 매일 하는 것, 그것은 몸을 치는 것이고, 나 자신의 마음을 참는 것입니다. 순종은 그래서 자기 부인입니다. 내 생각의 결론이 순종이 아니고, 내 마음의 끌림이 순종이 아니라, 순종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몸을 치고, 내 마음을 참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은 이 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자기 부인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순종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한, 주님을 닮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 부인의 연속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바울과도 같이,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과 같이 자기 부인과 참음의 인내를 통해 우리 앞에 주어진 경주를 잘 마치는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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