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9월 20일 설교, 고린도전서 12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9월 20일 설교, 고린도전서 12장

jo_nghyuk 2022. 9. 20. 23:29
9월 20일 화 저녁기도회
찬송: 563장 통 411
  • 예수 사랑하심을
말씀: 고린도전서 12:1-31
  • 더욱 큰 은사는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방언을 말하는 은사에 대해서 선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현대의 사회와 달리, 높은 지성이 인문과학적, 자연과학적 지식 뿐 아니라 영적인 지식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교회 안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성인일수록 신비하게 여겨지는 방언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참된 진리에 더 가깝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방언과 예언 기도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또 서로 예언 기도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버렸습니다. 바울이 말하듯이 지식은 쌓일수록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는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앞서서 고린도전서 설교를 할 때 나누었지만, 그래서 바울은 지식만 쌓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는 명령을 교회에 내린 바가 있습니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 기도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합니다. 1-3절을 보면 바울이 교인들에게 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전에 그들이 믿었던 우상은 말 못하는 우상이었지만, 이제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전하는 예언의 은사도 받은 것이 마땅합니다. 당시 공동체에는 은사 중심주의자들도 있었을테지만, 소위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예언의 은사의 신비함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맥락에서 3절의 말을 합니다: "이 은사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분별하는 기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즉 성령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영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이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고, 성령을 받은 이들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은사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를 하나님으로 섬긴다면, 그에게 임하는 영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공동체의 지체들의 사역과 은사와 모습이 다양할지라도, 성령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지, 다른 영이 역사하는 것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님은 한 분이며,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다고 4-6절에서 선포합니다.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4절은 성령에 대해, 5절은 주, 퀴리오스라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6절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른 다양한 지체들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다양한 지체들에게 성령을 또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역사하실까요? 바울은 7절에서 그 이유를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유익하게 하려 하시는 목적 대상은 누구입니까? 개개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으로 불리워지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지체가 한 분이신 하나님께로 연결되게 하는 중보자이십니다. 우리가 모습이 다양하지만 하나님께로 모두 향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영들이 있습니다. 악한 영들도 있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이끌고 예수님이 주인 되게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나의 삶에 주인 되시는 것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각 모양과 성격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이어지는 바울의 말을 보면, 이 공동체는 서로의 지체가 한 몸에 속하여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발과 손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어떨 때 보면 방향성도 달라보입니다. 손은 손이 하는 일이 있고 발이 하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일 같습니다. 귀도 그렇습니다.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감각적인 자료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눈은 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귀는 색과 형태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귀와 눈은 서로가 못 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합니다. 너는 내가 듣는 것을 왜 못 보니? 너는 내가 보는 것을 왜 못 듣니? 그들은 마치 완전히 다른 것을 듣고, 다른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듣고, 보는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세계 안에 있는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게 만드셨습니다. 귀가 못 보는 것을 눈이 보게 하고, 눈이 못 듣는 것을 귀가 듣게 하십니다. 손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 발로 그 장소에 가게 하시고, 발이 수고하여 지치면 손으로 그 발을 마사지하기도 하고 깨끗이 묻은 먼지를 씻게도 하시기 위해 서로를 다양하게 지으셨습니다. 서로를 다양하게 지으신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기 위해, 겸손하게 서로가 서로를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각자를 다양하게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상대가 나와 너무 다르다고 해서 그를 정죄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반문합니다: 다 너와 같을 수는 없다. 눈이 귀를 정죄하면, 몸에 다 눈과 같은 자들만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럼 듣는 것은 어떻게 하겠느냐? 귀가 코를 정죄하면 몸에 다 자기처럼 귀와 같은 자들만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럼 냄새는 무엇으로 맡겠느냐? 너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거라. 하나님이 다양한 지체를 몸에 두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지체와 몸은 따로 있지 않다. 개인과 공동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인이 한 공동체를 두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다른 이를 정죄하는 사람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교만을 의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2절: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 23절: 우리가 몸에서 덜 귀하다 여기는 그것을 하나님은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 주신다. 24절: 이것이 하나님이 몸을 균등하게 하나되게 하시는 방향이다. 네가 약하게 여기는 그 지체를 하나님은 더욱 요긴하게 쓰신다. 네가 덜 귀하게 여기는 그 지체를 하나님은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신다. 네가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지체를 하나님은 더 아름다운 것으로 입히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출발절은 어디였습니까? 우리는 존귀한 자로서, 자격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었나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비천했으며, 자격이 없었고,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로서 주님의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피투성이인 더러운 우리가 입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너무도 자주 우리의 처음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처음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성장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대단해져서가 아니라 고린도교인들처럼 우리가 원래 길을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자가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지체들, 특별히 연약하고 나와 많이 다른 이들을 오늘 고린도전서가 말하듯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면, 내가 주님이 가시는 길을 이탈했음을 인정하고 돌아와 회개하며 나의 삶을 다시 겸손하게 돌이켜야만 합니다. 
 
바울은 서로를 돌보게 하는 이 길이, 연약한 자일수록 귀중함을 입혀주는 이 길이 몸 가운데에서 분쟁을 없애는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느린 사람을 우리가 용납해주면,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반대로 연약하고, 느린 사람을 판단하는 말을 어디에서든지 하게 되면, 공동체는 긴장하게 되고 쉽게 지치고, 싸우고, 갈라지게 됩니다.
바울은 오늘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더욱 큰 은사가 무엇인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더욱 큰 은사는 예언이나 방언처럼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커지는 은사가 더욱 큰 은사가 아니라, 사랑의 은사가 가장 큰 은사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큰 은사는, 내가 가장 작아지는 길에 있습니다. 아니,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길에 가장 큰 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이 사랑의 은사의 길이 되기를 바라고, 우리가 늘 바라는 더 큰 은사가, 세상과 사람의 인정을 받는 화려한 길이 아니라, 약한 자를 감싸는 사랑의 은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