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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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1월 10일 저녁설교, 고린도후서 1:1-10

jo_nghyuk 2023. 1. 9. 18:23
11월 10일 목 저녁기도회
찬송: 455장 통 507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말씀: 고린도후서 1:1-10
  •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 꼭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말을 적어넣습니다. 독일에서는 Wie geht's?라고 물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답변과 Und dir?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영어권에 속한 사람들은 How are you?라고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듣지 않고 지나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도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 뒤에 물음표를 붙이지 않습니다. 안녕하십니까?는 원래 물음이지만 어느새 안부를 묻는 내용보다는 형식적인 인사의 기능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사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묻는 안부도 형식적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가끔은 기도할게요. 라는 말도 인사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를 문안하고, 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고린도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을 바라며 한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서신서들을 읽을 때 앞의 인사말들을 무심코 지나치는 때가 많습니다. 인사말은 형식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고린도후서 서신을 읽을 때에 유념해야 하는 점은, 이 서두에서의 인사와 문안이 이 편지의 전체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교회에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고, 교회가 평강을 다시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절부터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절과 4절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위로를 주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고린도 교회가 필요한 은헤와 평강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그 하나님은 3절이 말하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 또한 형식적인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예수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고난 받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분이시며, 고난 당한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 환난을 당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오늘 우리를 고난 중에 위로하셔서, 고난을 견디고 나아갈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긴다는 것은 고난이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신 분이시고 고난을 이기신 분이시지만 고난이 끝나서 그것을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난 중에 고난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주고자 하는 위로는 고난이 끝나는 위로가 아니라 고난을 이기게 하는 위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6절을 보시면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이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당시 심한 핍박이나 환난을 받았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 고난의 종류가 무엇이었던지 그 환난이 매우 극심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자신이 받은 환난에 대해 상기합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견딜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환난이라고 우리가 묘사하는 것은 우리가 견딜 수 없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사람이 처할 때 쓰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난이 너무도 힘겨워서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다보면 이러한 고난이 묘사됩니다.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두어가십시오. 나의 고난이 너무나도 견디기 힘듭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아시아 지역에서 큰 환난을 만납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 하기도 하고, 칼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늘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담대하게 하나님을 선포하고 대적자들을 물리치며 살다가도, 자신이 끊임없이 이세벨의 추격을 받고 위협을 받자 지친 나머지 나무 밑에 앉아 하나님께 내 목숨을 거두어가 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심한 고난을 '나의 죽음'이라고 설명합니다. 내가 이길 수 없고, 살 소망까지 끊어짐은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내가 나의 힘으로 넘어갈 수 없고, 나의 의지로 해낼 수 없고, 나의 계획과 지략으로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아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나라고 하는 주체가 완전히 박살이 나는 그 경험 가운데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9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누구를 의지하게 합니까? 내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역설적으로 부활의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나의 죽음을 먼저 겪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다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고난이 지나가면, 우리는 나의 힘으로 했다고, 나의 인내로 견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각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욥도 고난을 견디지 못해 불평을 시작하고 죽기를 바란다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그 욥의 한계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틀어진 것들을 고쳐주시고 직접 일하시기 시작하심으로 욥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연약함 덕분에 우리가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보다 강하게 고난을 견뎌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모든 일들 가운데, 우리는 우리 자아의 죽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의지를 가지고 하려고 합니다. 또 반대로,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의 중심에 위치한 자아가 죽기 전까지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앞서가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게 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이 앞서가시면, 저항하지 않고 그분을 따라가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늘 기도하는 삶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 여러분이 행하는 일과 만나는 상황 가운데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느껴지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시간 함께 기도합시다. 나의 삶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주님의 평강이 임하기를, 그래서 내가 주가 멈추라 할 때 멈추고, 가라 하실 때 가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여, 우리 삶에 주님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고난과 상황을 이기게 하는 위로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기도하여, 우리가 늘 승리하기를 간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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